[충남] 동부보훈지청 만세운동 알리기 첫번째 : 공주시
[충남] 동부보훈지청 만세운동 알리기 첫번째 : 공주시
  • 이지웅 기자
  • 승인 2019.03.2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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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계기 특집

△공주면(公州面)

3월 12일 공주읍 시장의 장날에 일단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려고 하였는데, 즉각 적의 강력한 제지를 받아 군중에 파급되지 못하고 주동 인물들이 연행되어 형세가 험악했다.

3월 15일 공주 읍내에서 약 3백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를 전개해 일본 경찰과 수비대원이 이를 제지했다.

3월 24일 밤 9시 경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金寬會)·이규상(李圭商)·현언동(玄彦東), 졸업생 김사현(金士賢), 학생 오익표(吳翼杓)·안성호(安聖鎬), 목사 현석칠(玄錫七) 등이 영명학교의 한 방에서 4월 1일 하오 공주 장날에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합의하고 교사 김관회가 영명학교 학생 포섭을 책임졌다.

그리하여 그는 3월 25일 자택에서 동교 조수 김수철(金洙喆)에게 학생 동원과 독립선언서 인쇄를 맡겼다. 독립선언서는 학생 윤봉균(尹鳳均)이 서울에서 가져온 것인데, 경비 10원을 주어 약 1천매를 등사하도록 부탁했다.

그리하여 김수철은 30일 자택에서 학생 유준석(柳俊錫)·노명우(盧明愚)·강윤(姜沇)·윤봉균(尹鳳均)을 불러 그 취지를 설명해서 승낙을 받고, 이들 5인은 다음 31일 하오 3시에 영명학교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1천매를 등사했다. 또한 김수철은 졸업생 이규남(李圭南)에게 큰 태극기 4개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하여 4월 1일 이들은 학생 노명우가 태극기 1본과 선언서 약 1백매, 유준석과 강윤이 각각 선언서 약 1백매, 윤봉균과 졸업생 김현경(金賢卿)과 조수 김수철이 각각 태극기 1본씩, 학생 양재순(梁載淳)이 선언서 약 1백매를 가지고 하오 2시 시장에 나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하지만 일제의 강력하고도 신속한 제지로 수천 군중에 파급되지 못하고 비교적 소규모로 시위가 좌절되어 태극기 2본과 선언서 110매가 압수되고 김관회·이규상·김수철·유준석·노명우·강윤·윤봉균·양재순·이규남·김현경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지난 3월 14일 신상면(新上面) 유구시장(維鳩市場)의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가 구금된 천도교인 황병주(黃秉周)의 고용인 김희봉은 주인의 구금을 분히 여기고 그의 애국심을 이어받아 뜻을 펴고자 4월 17일 공주 시장에 나가 파장 무렵에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여 1천여 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했다.

△ 신상면(新上面)[현재 유구면]

3월 14일 유구시장(維鳩市場)의 장날 하오 4시경 천도교 신자 황병주(黃秉周)가 스스로 선창하여 약 30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는데, 이에 참가하는 군중수가 늘어 삽시간에 5백여 명에 달하여 만세를 소리높이 외치며 시장을 누비고 다니게 되었다.

이때 일인 경찰[高山]이 황병주를 연행해 가자 군중들은 황병주를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에 밀어닥쳤다. 그리하여 황연성(黃璉性)과 박준빈(朴準斌)은 왜경에게 황병주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만일 석방하지 않으면 해산하지 않겠다고 항의하면서 일인 경찰의 가슴을 찌르고, 이정춘(李正春)·김병헌(金秉憲)·현우석(玄宇錫)·김상규(金相圭) 등은 앞장서서 주재소에 투석하며 막대기로 문등(門燈)을 깨었으며, 이승현(李升鉉)은 시장에서 군중을 동원하여 주재소에 밀어닥치는 등 기세가 당당했다.

하지만 공주경찰서원과 수비대원들이 달려와 해산되었는데, 검거되어 재판을 받은 사람이 23명에 이르렀다. 그 중 황병주·이정춘·김병헌·현우석·김상규는 징역 2년, 박준빈·이승현·황연성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4월 1일 밤 8시 유구(維鳩)에서는 산위에 횃불을 놓고 천변(川邊)에서는 횃불을 들고 많은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휘황찬란한 시위를 벌이다 일본 헌병의 강력한 제지로 인해 해산했다.

△ 정안면(正安面)

4월 1일 정안면의 석송리(石松里) 주민들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15리길을 행진하여 내촌리(內村里)를 경유했고, 면사무소 소재지인 광정리(廣亭里)에 이르러서는 8백여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고 시장을 누비고 다니며 경찰주재소를 파괴했다. 그리고 이 급보를 받고 응원차 달려오는 충청남도 경무부 경찰의 자동차를 세워 모욕을 주었다. 이에 따른 일제 경찰의 발포로 인해 1명이 즉사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10여 명이 경상을 입었다.

이 운동의 주동 인물은 석송리에 거주하며 주민의 존경을 받는 유림(儒林) 이기한(李綺漢)과 이병억(李秉億)으로, 궐기를 호소하여 군중을 모아 광정리로 향하였으며, 그 기세가 당당하여 도중에서 호응한 참가자가 점점 늘어나 광정리에 이르러 만세시위를 하다가 이기한의 명령으로 경찰주재소를 파괴했다. 즉 김오룡(金五龍)·이돈석(李敦錫)·이월성(李月星)·김삼룡(金三龍)·윤원식(尹元植)·홍점산(洪點山)·황타관(黃他官) 등이 솔선하여 발, 삽, 지게막대기 등으로 벽을 무너뜨리고 게시판도 후려갈기고 창과 유리문을 부수어 깨고 건물 벽도 후려치며 기세를 올렸다. 이에 그치지 않고 부근의 일인 가옥의 창과 유리도 부수었다.

하오 4시경 14~15명이 김원일(金元日) 집 앞에서 10명의 일제 경찰과 헌병이 탄 자동차를 가로막아 이에 하차한 헌병군조(憲兵軍曹)와 경찰을 놀렸는데, 노규현(盧奎鉉)·정화순(鄭化順)·문백룡(文白龍)·정재철(鄭在喆)·김정쇠(金正釗)·김정길(金鼎吉)·장기현(張基鉉) 등이 경찰을 전후좌우에서 이리저리 떠밀었으며, 이동엽(李東葉)은 헌병 군조의 칼집을 잡아 이를 빼앗으려고 해서 그들에게 큰 곤욕을 주었다.

그 외에 이날의 시위에 참가한 이소보(李昭甫)·이선봉(李先奉)·유고도(兪古道)·최태식(催泰植)·이완용(李完用)·원강희(元江熙)·최범성(崔範聲)·지기찬(池己瓚)·강억쇠(姜億釗) 등이 모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시위운동은 이에 그치지 않고 4월 3일까지 계속되어 부근의 산과 들에 횃불이 올려지며 수많은 군중이 모였다 흩어졌다 했다.

△ 의당면(儀堂面)

4월 1일 의당면에서는 약 8개소에서 4백여 명의 면민이 각각 일단이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했고, 다음 4월 2일에도 6백여 명이 10개소로 나누어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 장기면(長岐面)

4월 1일 밤 9시경부터 다음날 상오 2시까지 도계리(道溪里)의 주민 약 1백명이 산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달고 횃불을 올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자 급보를 접한 공주경찰서의 왜경이 수비대의 보병과 함께 달려와 총검으로 해산시키고 주동 인물 7명을 체포해 갔다.

이후 숫자가 늘어 30여 명이 연행되고 김가동(金嘉東)·김세현(金世顯)·이선구(李宣求)·이교찬(李敎燦)·이성실(李成實)·박정오(朴正五) 등은 검사국으로 송청되었다.

△ 계룡면(鷄龍面) 경천(敬天)시장

4월 2일 경천시장에서는 1천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일대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 우성면(牛城面)

4월 2일 밤 쌍신리와 도천리 주민들이 근처 산 위에 올라 횃불을 놓고 목이 쉬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 탄천면(灘川面)

4월 3일 밤 약 1천5백명의 군중이 산 위에 올라 횃불을 놓고 목이 쉬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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