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벽상검] 103회/ 9장 두 혁명가 (7)
[연재소설 벽상검] 103회/ 9장 두 혁명가 (7)
  • 이 은호 작
  • 승인 2021.01.2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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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과 김윤식의 불화는 개화파를 지리멸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임오군란의 발생과 전개 그리고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개화파는 아예 존재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다. 임오군란의 뒤처리 과정에서 가장 탁월한 모습을 보인 사람은 김윤식과 민영익이다.

이들의 활동공간은 전적으로 대원군의 중국 나포에서 생긴 자리였다. 청군의 수장이던 오장경은 군란이 진정되자 청나라로 돌아가면서 순식간에 대원군을 나포하여 끌고간다. 오장경의 힘은 사천여 명의 군대의 힘보다는 대청국이라는 조선이 갖고 있던 노예근성이 더 컷다. 오장경의 초대를 받고 갔다가 나포된 대원군을 구출하겠다고 나선 조선인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대원군의 명이라면 왕비도 죽이겠다고 나섰던 그의 측근들도 청국에는 꼬리를 내릴 정도다.

조정의 정치지형은 급격하게 친청파로 쏠렸다. 다시 집결한 민씨척족들은 친청을 넘어 청나라의 주구(?)를 자임할 정도였다.

김옥균은 김윤식과 충돌한 후 정동 자신의 집에 칩거하여 다께조에, 이토우 등 일본공사관 직원들과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냈다. 김옥균의 집은 일본인들만이 아니라 박영효 서광범 등이 수시로 드나들며 기연(碁宴)을 벌였다. 바둑과 술 그리고 시연 등으로 질펀한 자리였다. 김옥균은 자신의 저서 '갑신일록'에 이렇게 기록한다.

- 다께조에가 집으로 찾아왔다. 바둑을 두었다. 금릉위 광범(서광범) 등이 합석했다. 다른 이들이 바둑을 둘때면 다께조에와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밀담을 나누었다.

임오군란의 충격을 받은 군왕과 친청파는 포도청과 한성부 형방 기찰 포교들을 풀어 요주의 인물들의 감시에 나서고 있었다. 김옥균도 그 감시대상이었다. 김옥균은 기찰망의 감시를 바둑모임으로 따돌리고 있다. 당시 바둑과 시 그리고 술자리가 어우러진 모임은 공공연한 것으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아니었다.

김옥균의 지근에서 바둑으로 이름을 떨친 이토우는 일본 전통의 바둑 가문이 붕괴하고 방원사 등 여러 바둑단체들이 이합집산을 할 때 조선으로 건너와 일본공사관의 촉탁으로 있었다. 이토우는 방원사 멤버였으나 금전적 사고를 일으켜 축출당한 입장이었다.

일명 사가문(四家門)으로 통하는 일본전통 바둑가문이 붕괴한 후 방원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방원사에서 일본기원이 창립되는 시간적 공간에는 수많은 바둑단체들이 이합집산을 하는 반상의 '전국시대'가 있었다. 이 사실은 불과 수주 전에 발표된 '다니오카이찌로'의 논문에서 논의된 사실이다. 이전에는 방원사 외에는 다른 단체들의 모습은 불과 수십 명 정도의 연구자들 외에는 잘 모르던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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