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Ⅲ : 면천객사의 복원
[기획] Ⅲ : 면천객사의 복원
  • 이지웅 기자
  • 승인 2021.01.19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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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데이충남 이지웅기자] (고대영 학예연구사 글)   여지도서를 비롯한 기록에 따르면 면천 객사는 82칸으로서 인근의 공주목(32칸), 홍주목(43칸)에 비해 매우 큰 규모를 자랑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진이 예로부터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남부지방에서 뱃길로 안흥량을 거쳐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또한 서울, 인천에서 남쪽으로 해로를 통해 내려가다 보면 면천지역에서 상륙하고, 이후에는 육로로 이동하는 등, 교통의 요지로서 묵어가는 사람이 많았을 확률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진 앞바다에 있는 대난지도에는 조운선이 피항하고 위급 시에는 구조, 지원하는 군영이 존재했으며, 난지도 주민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 군영 인근의 고갯길을 [왕재]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왕과 같이 화려한 복장을 한 사람이 오랜 옛날이 지나갔다고 전하는데, 아마 중국 사신이 뱃길로 왔다가 이곳에 피항하면서 상륙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하지만, 명확하게 문헌에 이러한 사실이나, 면천객사를 이용한 내용이 명기되어 있지 않아 지속적으로 확인이 필요하지만, 많은 기록에서 객사의 규모가 82칸으로 작성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면천객사는 당호가 조종관(朝宗官)으로 목판의 중수 기록문에 의하면 세종15년(1433년)에 건립됐다고 전하는데, 이행이 쓴 「면천객사중수기(沔川客舍重修記)」가 면천군수 윤환이 중종 10년(1515년)에 중수한 것을 토대로 작성됐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군수 강전의 조종관 상량문에 따르면 중종 17년(1522년)에 창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차이가 있기도 하다. 이후에도 수차례 중수를 거쳐 되기도 하는 등, 생각보다 자주, 빈번하게 중수하고, 관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현종 3년(1662년) 군수 강전의 상량문에는 군수 강전을 비롯한 협조한 22명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고, 거기에는 양반 4명, 아전 8명, 천민 8명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매우 독특하다.

면천객사는 대부분의 객사와 만찬가지로 정청에 국왕의 궐패를 봉안하면서 북쪽을 향해 배례를 하고, 좌우 익헌에는 온돌방을 두어 숙소로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세기 후반 면천군수를 지낸 박시순의 면불일기에 따르면 1894년 ~1895년 매월 1일과 15일 보름에 조종관에서 삭례, 또는 망하례를 집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고지도에도 면천객사는 객사 앞의 삼문, 담장과 함께 간략히 표시되어 있다.

면천객사는 1909년 객사제도가 폐지되고, 일제 강점기에 들어오면서 1911년부터 당시 면천공립보통학교로 활용됐다. 이후 면천군이 철폐되면서 읍성과 함께 더욱 쇠락했다. 객사의 서익사는 30년대 철거됐고, 객사의 정청과 동익사는 72년까지 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됐다. 재미있는 점은 면천초등학교의 졸업사진에 당시 학교 교사로 사용하던 옛 객사를 배경으로 촬영해, 졸업사진을 통해 변화해가는 객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객사는 당초에는 어느정도 형태가 유지됐으나, 이동의 편의를 위해 정청과 동익사를 연결하고, 정청에 일본식의 현관 입구를 조성했다. 이후 지붕이 변화하고, 벽체가 변화하는 등 계속 학교운영의 편의에 맞게 보수되다 1972년 완전히 헐리고 2층의 콘크리트 건물로 신축되게 됐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조종관 현판과 상량문 부분, 일부 주련과 자료 등은 초등학교에서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관하던 자료는 2016년 협약을 통해 당진시에 기탁해 현재 당진시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객사의 복원 이야기는 2000년대 들어서부터 시작됐는데 면천객사의 복원은 2007년 면천읍성 복원정비계획 수립에 포함됐다. 1872년 면천군 지도와 82칸에 달했다는 고문헌, 지표조사 보고서에 의거, 좌익사는 전면 5칸, 측면 2칸, 전대청은 전면 5칸, 측면 3칸, 우익사는 전면 7칸, 측면 2칸으로 추정해 복원정비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초등학교가 객사터에서 기능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은 2012년 초등학교 건물이 노후, 안전성 진단 결과 건물에 대한 위험도가 높은 것으로 드러나면서 부터다. 당진교육지원청과 당진시 간의 초등학교 이전이 논의됐고, 당진시의 일부 이전 예산 지원으로 2016년 성 밖으로 면천초등학교가 이전되게 됐다. 

당초에는 기존 초등학교 교사를 철거한 후 지표에 노출된 초석을 보고, 기존 초석을 활용해 교사를 건립한 것으로 파악해 객사의 규모와 형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발굴과정에서 초석은 문화층 위로 현대층에 포함, 이탈 및 교란상태에 놓인 것으로 파악되면서 결국 중층발굴로 전환해 객사의 위치와 규모를 파악할 수 밖에 없었다.

중층발굴을 통해 객사로 추정할 수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수많은 시설의 유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객사의 기단부, 적심, 동서익사의 온돌시설 흔적, 건물지와 연결하는 보도시설과 객사의 남쪽과 서쪽의 박석시설, 축대와 담장을 확인해 복원작업의 어느 정도 기반과 토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발굴결과 적심의 배치로 정청과 서익헌은 정면 3칸, 동익헌은 정면 3~5칸, 측면은 2-3칸 정도의 구조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지만 본격적인 복원을 위해서는 정확한 규모와 형태를 파악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방법을 활용 할 수 있었다.

우선, 앞에서 말했 듯 면천초등학교의 졸업사진을 참고할 수 있었다. 특히 2011년 면천초등학교 100년사 책자가 발간됨에 따라, 책자에 수록된 졸업사진 (1회~58회)을 통해 당시까지 잔존하고 있던 객사의 구조와 건축 특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칸수와 지붕의 형태, 익공의 구조 등을 추정할 수 있었다. 1950년대 면천초등학교에 근무했던 교직원들의 증언과 면천초교에 다녔던 당진군 이춘의 전 면장이 기고한 글을 통해서도 규모와 내부의 형태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졸업사진을 보면 객사의 형태가 비교적 온전했던 일제강점기에도 매년 변화되는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계속 보수하면서 원형이 훼손되다보니, 이러한 초등학교 졸업사진의 참고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졸업사진의 특성상 학생들이 부각되는 만큼, 초등학교 졸업사진으로는 사진이 부족할 수 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세부 기록도 부족한 만큼, 현존하고 있는 유사사례를 검토하여, 참고할 수 밖 에 없었기에, 인근의 홍산객사, 부여객사 사례를 참고하여 건물 양식과 규모를 확정하게 되었다.  

행정업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연구와 도출되는 결과가 다른 점도 큰 부담이었다. 과거 면천읍성 복원정비계획이나 면천읍성 연구 등 읍성의 복원정비를 위해 검토하고 연구결과로 도출했던 객사의 형태가 발굴조사 결과 다르게 나타난 것도 부담이 되었다.

아울러, 자문에 참여한 문화재 위원들의 성향에 따라 복원 시점에 대한 의견이 다른 것도 문제였다. 고고학, 건축, 역사학 등 전공에 따라 제도가 확립된 조선시대 초기, 일부 원형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사진 등 근거가 남아있는 조선 후기 등 기준시기에 대한 주장이 상이하였던 것이다.

당초 발굴하면 초석과 기단이 그대로 노출되고, 규모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지만, 진행하는 과정에서 중층발굴로 진행되며 시간이 지체되었고, 복원설계 과정에서도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시간이 소모되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끝으로 활용의 문제이다.

아직까지 많은 지역에서 읍성 내의 관아나 객사시설을 복원은 하되,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시에서도 충청유교문화군 개발사업과 연계해 객사를 교육체험공간으로 활용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객사의 정청은 본래 제의 공간이다 보니 활용에 많은 제약이 있다.

그렇지만 수십억을 들여 복원하는 상황에서 향후 운영 프로그램이나 활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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