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벽상검] 101회/ 9장 두 혁명가 (5)
[연재소설 벽상검] 101회/ 9장 두 혁명가 (5)
  • 이 은호 작
  • 승인 2021.01.19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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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까지 불과 2년의 기간을 전혀 조명하지 못하고 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외에는 거의 백지상태인 그 2년간 조선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임오군란은 처우에 불만을 가진 군졸들의 봉기(?)라지만 기실은 그들의 불만을 이용한 대원군의 친위 쿠데타다.

역사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사이의 격동의 에너지를 무시(?)하고 단순한 사건의 전개와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소설을 써댄다. 그 점에서는 김옥균이란 인물 한사람을 그리면서도 장황한 필설을 늘어놓는 필자와 다르지 않다.

임오군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조선조정은 군란에서 많은 피해를 당한 일본공사관과 일본인들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박영효를 정사로 한 사절단을 일본에 보내게 된다. 박영효는 이때 군왕, 즉 고종의 친필 서찰을 들고 간다. 이 서찰의 내용이 박영효의 문집인 '사화기략'에 들어있다.

삼가 이에 조회합니다. 폐방(弊邦)의 6월초 10일 군란(軍亂 곧 임오군란)은 실상 고금에 없던 변고였습니다. 그때는 창황하고 급거(急遽)하여 미처 전사(專使)로 서계(書契)를 보내지 못하였고, 이제 별도로 개요를 진술하여 환란(患難)을 같이하고 분개(憤慨)를 함께 하는 뜻을 포고(佈告)합니다. 생각하니 변란이 겨우 안정되자 관곡한 우호를 마땅히 서계로 보내야 할 것이기에, 현재 폐방(弊邦)에서는 조정의 명령으로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 금릉위 박영효와 전권부관 겸 수신부사 김만식(金晩植)과 종사관 부정자(副正字) 서광범을 파견하여 전사(專使)로 귀국에 가서 교제 사무를 판리(辦理)하게 하였으니, 미진한 사의(事宜)는 스스로 작량(酌量)하여 타협할 것입니다.

귀 조정(貴朝廷)에서 성신(誠信)으로 서로 믿고서 화해(和解)의 사무를 능히 성공시키기를 바라면서, 몹시 기다려짐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편안하심을 송축합니다.
별도로 상세히 진술하는 것은, 폐방(弊邦)이 귀국과는 평소부터 우호가 돈독했는데 지난번 이래로 더욱 보거(輔車)ㆍ순치(脣齒)와 같은 형세가 있었기에, 피차가 서로 화목을 보전하여 영원히 편안하기를 바랐었는데, 어찌 뜻밖에 변란이 일어나고 난역이 느닷없이 발생하여 서울에 폭풍이 일어나고 궁궐에 돼지같이 돌진하여 폐방(弊邦)의 왕비(王妃)에게 몰래 사차(私次 민간(民間)의 집)로 납시게 하고 보신(輔臣)ㆍ근신(近臣)이 같은 때에 살해를 당할 것을 생각했겠습니까?

귀국의 공사관까지 타버리고, 교사(敎師)가 살해를 당하고 죄 없는 사람이 비명횡사 하여 모두 참혹함을 당하였으니, 이는 고금에 없던 화란이었습니다. 모두가 폐방의 신료들이 조정의 명령을 능히 보좌하지 못하고 나라의 사무를 안정시키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른 때문이니 얼굴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군왕은 민영익을 통하여 처음 민비의 생존을 확인할 정도로 대원군 세력에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청군의 개입이 아니었다면 자칫 군왕의 자리도 보전치 못했을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에 정국이 다소 진정되는 듯하자 일본에 사과의 사신단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고종은 군란의 책임을 자신의 부덕으로 치부하고 있다. 동시에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수레와 바퀴 그리고 입술과 잇몸 관계라 말하고 있다. 고종은 박영효의 '사화기략'을 통해 나머지 말을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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