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벽상검] 95회/ 8장 속음청사 (11)
[연재소설 벽상검] 95회/ 8장 속음청사 (11)
  • 이 은호 작
  • 승인 2021.01.1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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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어느날 시간을 내어 '면천'에 있는 김윤식이 귀양살이를 했던 '노전채'를 찾은 적이 있다. 면천은 읍성(邑城)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지다. '노전채'는 영탑사라는 절의 법당으로 노사나불을 모셨던 곳을 김윤식이 잠깐 빌려(?)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귀양살이가 고달프던 시대의 단면이다. 김윤식은 이곳으로 고종24(1886)년 유배명을 받고 고종29년 다른 곳으로 유배지를 변경 당할 때까지 6년여를 지냈지만 그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산기슭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김윤식이 새겼다는 의두암(依斗岩)이란 글자가 반갑다. 의두암은 김윤식이 바위에 앉아 한양쪽을 바라보며 귀양이 끝났다는 통지문을 기다리던 장소로 전한다. 그러나 믿기지는 않는다. 바위에 앉아 휴식을 취했던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가 바위에 금석문을 새겼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 누군가 후대 사람이 그를 그리며 새겼을 것이다. 김윤식의 유배 사실은 역사에는 단 한줄로 기록되어 있다.

- 의금부에 김윤식을 면천에 유배시키라 전하라. (義禁府以下金允植沔川郡定配所啓)

(승정원일기)


김윤식이 유배를 간 이유도 정확치 않다. 학자들은 청국에 끌려간 대원군의 복귀를 꾀하다 민비의 미움을 받은 것으로 파악하기도 하고 또 다른 견해는 러시아와 어떤 공작(?)을 벌이다 고종의 처분을 받았다는 등 중구난방이다. 김윤식이 자신의 방대한 일기 속에 귀양의 근거를 털어놓지 않는 이유도 불가사의다.

김윤식의 일생은 친일파도 친청파도 아니었던 듯하다. 그와 함께 대원군파도 민비파라고도 볼 수도 없다. 한발짝 더 나가면 김윤식은 개화파라고도 할 수 없을 듯하다. 김윤식은 그들 제파 모두와 친했고 그들 제파 모두와 원수(?)를 산 적도 있다. 김윤식은 그 이유를 자신의 일기 속에서 말한다.

- 나라를 잘되게 하는 것이 충이고 부모를 오래 모시는 것이 효다.

이유는 이것이다. 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식민(殖民) 모두의 바람이다.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행복한 것에는 매국도 당파도 필요없는 것이다. 김윤식은 오직 앞으로만 나갔던 듯하다. 그것은 매일매일 당면하는 현실적 과제에 대한 김윤식 나름의 최선의 방법이기도 했다.

나라의 일을 하는 관원은 나라의 이익을 키우고 지키는 것이 덕목이다. 나라의 이익과 보위(保衛)에 있어 친일이나 친청 등 정치적 노선은 사가 아닌 공적인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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