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벽상검] 63회/ 6장 김옥균의 바둑 (3)
[연재소설 벽상검] 63회/ 6장 김옥균의 바둑 (3)
  • 이 은호 작
  • 승인 2020.11.2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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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효는 김옥균의 특기가 바둑과 서예 그리고 재담에 능했다 말한 바 있다. 김옥균의 바둑에피소드 중에 배꼽을 잡는 재담이 종종 끼어 있는 것을 보면 박영효의 말이 실감난다. 아래의 글은 1960년 국민신보에 '최송장'이 일본신문을 보고 번역하여 소개한 글이다. 신문은 오사카 지역의 지방지로 '수나메'라는 우익 인사가 관여했던 신문이다.


이조말엽 고종 이십일년 갑신정변, 속칭 삼일천하에 실패를 한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동경(도쿄)에 익거하면서 일본의 정객은 물론 조야 명사들과 번거로운 교제를 하며 낭인 생활을 하였다.
그 탁원한 지약성과 고절한 인격은 일본 조야에 명성을 떨치었다.
이때 동경(도쿄)시내 한 모퉁이에서 생선 장사를 하는 일본인 한 사람이 장사에 실패를 거듭하던 끝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유명한 김옥균 선생을 찾아가 문의하면 무슨 좋은 도리가 생기리라-) 그는 곧 김옥균 선생을 찾아갔다.

그때가 마침 여름철이었다. 김옥균 선생이 계신 집 이층 넓은 방에는 일본인 정객들이며 낭인들이 가득 모여서 바둑도 두고 혹은 시국담도 하며 또한 낮잠들도 자고 있는 판이었다.
그때 선생은 몸이 피곤하여 누워 있었다가 막 잠이 들었는데 옆의 사람이 손님이 찾아왔다고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 본즉 그 손님이라는 자가 상상 이외의 인물이었다.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이고 윗도리고 가슴팍이를 내놓은 채 헌옷을 걸치고 두 다리를 전수 내놓고 성큼성큼 이층으로 올라와 김옥균 선생 앞에 엉거주춤하고 서 있는 것이었다.

김옥균 선생은 어이가 없었으나 찾아온 사람이라 정중히 대하고 그 온 뜻을 물었다. 그 일본 사람은 고개를 굽신굽신하며 하는 말이

"어려서부터 생선장사 집에서 남의 집살이를 하다가 최근 자영으로 생선장사를 시작하였는데 아무리 하여도 밑지기만 하니 어떻게 하면 장사가 잘되겠나 그 방법을 좀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것이었다.

김옥균 선생이 정치·경제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계시므로 일본에 유식계급의 인물들이 높이 받들어 우러러 보고 있으니까 이 생선장수 생각에 그렇게 훌륭한 분이라면 세상에 모를 일이 없으리라 내가 한번 찾아가서 이 답답한 사정 이야기를 하고 생선장사 잘될 방침을 가르쳐 달라고 하리라 하고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김옥균 선생과 생선장수와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이다. 생전 한번도 생선가게를 가본 적도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속으로 고소를 느낀 나머지 무어라 할 말도 없고 하여서 농담 삼아서 "가다 빠시오 아계 네소병오 야례" (한 다리를 들고서 오줌을 누어라) 하였더니 그 생선장수는 매우 공손한 태도로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해붙이고 돌아가 버리었다.
그 생선장수는 매우 우직하던 모양이서 김옥균 선생에게서 돌아가는 길로 반드시 한 다리를 들고 소변을 보기 시작하였다.

-국민신보에서


수나메는 두산만으로 불리는 일본 야꾸자의 원조격인 인물의 추종자로 김옥균이 일본망명시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던 사람으로 김옥균이 '본인방 수영'과의 인연도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수나메는 김옥균의 경호원이던 우범선이 일본에서 살해되었을 때 일본정부가 우려를 할 정도로 김옥균 보호에 앞장을 서기도 한 자칭(?) 협객이기도 했다.

김옥균의 에피소드는 당시 일본에서 김옥균이 어떤 대접을 받고 살았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김옥균은 조선의 협객으로 그리고 출중한 문사로 일본국내의 인기인이었다. 일본사람들은 김옥균의 얼굴을 한번 보는것도 자랑(?)으로 알 정도로 존경하고 흠모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김옥균이 일본인들에게 한 행동은 조금 의외다. 위의 기록의 뒷장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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