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벽상검] 62회/ 6장 김옥균의 바둑 (2)
[연재소설 벽상검] 62회/ 6장 김옥균의 바둑 (2)
  • 이 은호 작
  • 승인 2020.11.2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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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圍棋)

棋는 一에 奕이라고 하여 支那 古來의 說에는 堯가 그 아들 '단주'를 교훈하기 위해 창작하였다 하고, 또는 舜이 아들 '상균'을 위해 만든 것이라 하니 이 까닭으로 요와 순을 혁제(奕帝)라 하기도 한다. 근래의 학자들중에 '마원중' '혁단평' 등이 바둑은 고대 인도의 산물이라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여하간에 진역(우리나라)에 棋가 支那에서 전래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연대와 경로는 밝힐 수 없다. (신당서) 고구려전에 위기 투호를 즐긴다'好圍棋投壺之嬉'라 하고 (후주서) 백제전에 투호 저포 바둑이 유행했고 그중에서 바둑이 더욱 성행했다'有投壺樗捕等雜戱然尤尙奕碁라 하고 (구당서)에 또 개원25년에 신라로 사신을 보낼 때 바둑을 잘두는 사람이 많다하여 병부에서 양계응을 발탁하여 보냈다'其人多善奕碁因今善碁人率府兵曺楊季鷹爲副玆'하니 삼국에 걸쳐 棋道가 성했음을 알 것이다.

위기가 정치에 이용된 경우는 支那에 많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쟁패시에 첩보작전에 이용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신라의 대당외교에 棋를 통한 이면공작에 활용되고 사적 친선관계에 유용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 최남선 조선상식 중에서.


이 글은 최남선의 '조선상식'의 인용이다. 최남선은 지나(중국) 근역(우리나라) 등을 한사코 고수할 만큼 나름의 역사관에 자긍심이 있던 사람이다. 바둑이란 우리 고유의 용어가 있음에도 한사코 碁, 圍棋, 棋를 고집하기도 한다. 최남선은 요즘으로 따지면 '이어령' 비슷한 학자로 박학다식을 학자의 지선으로 알던 사람이다. 최남선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고자료를 주변학자들에게 보여 주지 않기로도 유명했다.

학자라면 자료는 자신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요즘처럼 서고에서 찾아 면전에 보여주어도 별 감흥이 없는 학문풍토로 따지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최남선은 바둑의 인도기원설에 부정적이다. 다만 한반도에 바둑이 중국에서 직접 들어온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한다. 최남선의 생각은 한반도 바둑의 기록들과 인물들을 찾아내고 또다른 반상게임인 장기의 연구에서 얻어낸 것이기에 가치가 있다.

필자가 볼 때 21세기까지 한국바둑사는 최남선이 1940년초에 발표한 원고 20매 정도의 이 리포트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최남선 이후 바둑사를 언급한 거의 모든 필자들의 언급이 이 리포트를 반복 재탕하고 있을 뿐이다. 한심한 일이다.
최남선은 장기란 말의 상한연대를 조선중기로 특정한다. '상희' '상기 '상반' 등 장기를 뜻하는 용어들 속에서 '장기'란 말이 조선중기와 비슷한 시대 일본에서 동시에 출현했다는 것이다.

최남선의 이 말은 棋를 놓고 바둑과 장기를 주도하는 입장의 사람들이 바둑이니 장기니 하며 아전인수의 해석을 하는 풍토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실례로 '예성강곡'으로 전해지는 고려 여인과 하두강의 에피소드를 '장기'로 치부하는 행태 등은 시정되어야 한다. 최남선은 김옥균이 말한 바둑의 인도 기원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남선은 바둑을 거론한 김옥균의 언급을 보았던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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