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벽상검] 59회/ 5장 자객 (11)
[연재소설 벽상검] 59회/ 5장 자객 (11)
  • 이 은호 작
  • 승인 2020.11.1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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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줄타기가 끝나자 중갓에 흰도포 차림의 한 사내가 나와 한줄기 긴 목청을 뽑아들었다. 그의 좌측에는 큰북을 앞에 놓고 앉은 고수(鼓手)가 앉아 장단을 치고 있었다. 가객은 신재효(1812-1884)였고 그가 뽑아든 노래는 기가(碁歌)였다. 바둑의 노래란 의미다.

필자는 일본 만엽집에 세 편의 바둑을 주제로 한 노래가 있다는 걸 알고 백방으로 탐문하여 세 편 전부를 확인한 바 있다. 만엽집의 바둑의 노래는 매우 짧은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신재효가 부른 바둑의 노래는 한바탕 이야기판을 꾸밀 정도로 긴 것이 특징이다. 이 노래는 임형택이 학계에 소개한 것이다.


일꾼 불러 도끼 들고 연주산에 들어가니
최고봉 바위 밑의 천년 오동나무 찍어내어
공수자(장인) 먹줄 맞춰 네 귀를 재단하여
구씨야(장인)의 쇠줄 뽑아 지주결망 칸 고르니
삼백육십 일혈이라.
이구십팔 또 한줄은 십구로가 소상하고
삼팔이이십사 순(旬)장은 도화점이 분명할세.
채석강 얕은 여울 죽장망혜 내려가서
풍성에 깔린 돌을 낱낱이 주어 내어
일흑일백 음양석을 다 각기 주워 담아
송죽헌 대국하니 낙자정정(落子丁丁) 금운이라.
수리청담(手裡淸談) 좋거니와
국상전쟁 장관일세.
생사간 길흉 보고 선후천 기후 살펴
양인 승부 결단하고 일장승패 구경하니
너의 虎口 믿지마라
나의 魚腹 깊었으니
네놈 낚기 가소롭다.
예 놓으면 還擊이요 제 놓으면 自死로다.

놀기 좋은 벗님네들 위기(圍碁)하니 벽이 있기로
국상의 이치로 세상 일을 망각하니
비리(고통)도 물렀거라. 난방(어지러움)도 의외로세.

바둑의 노래는 먼저 사서삼경과 육도삼략을 배워 부귀공명을 도모해야 할 조선의 사내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풍류로나마 질탕하게 세상을 노닐며 염병을 떨다가 문득, 취몽에 깨어보니 세상사 속절 없다는 한탄조의 사설 가요다.

신재효는 말년에 고향 고창에 내려가 한약방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의 생가가 그곳에 있다. 고창은 부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바둑의 노래에 나오는 부안을 떠올려 보면 신재효와 바둑이 매치된다. 신재효는 가객이었지만 바둑에도 조예가 있었던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둑에 대한 이런 심층적인 속내를 피력할 수가 없다.

이 노래 속에 바둑이 옷소매가 일으키는 맑은 바람이란 말과, 국상의 전쟁 등은 신선하고 참신하다. 특히 순장을 말하며 한자 旬(열흘순)을 쓰고 장자는 한글로 쓴 것도 순장이란 한자의 고증을 놓고 우왕좌왕하는 오늘의 현실을 증명하는 듯하다. 환격이나 자사, 그리고 축 등의 바둑 언어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것은 바둑의 연구자료로도 유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노래는 한글과 한자를 겸용하여 쓰고 있기에 한역을 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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