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벽상검15회/ 2장 박회(博會) (3)
[연재소설 벽상검15회/ 2장 박회(博會) (3)
  • 이 은호 작
  • 승인 2020.09.14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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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세가 이러한 때 우리 조선은 어떻해야 한다고 보시는가?"

유대치가 김옥균에게 물었다. 그들은 사제간이었다. 유대치는 구한말 오경석(1831-1879)과 더불어 탁월한 역관으로 생몰연대가 정확하지 않다. 유대치의 본명은 유홍기(劉鴻基)로 한국역사가 중세에서 근대를 부르는 단초역할을 한 인물의 생몰연대도 모른다는 것은 역사를 한다는 사람들의 직무유기다.

유대치가 오경석보다 연배라는 사실도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의 글 속에 나온 말이다. 유대치는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진 인물이니 유대치의 생몰연대는 오경석보다 몇년 전에서 갑신정변직후가 되는 셈이다. 오세창은 자신의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유대치를 은연중 자신의 아버지 아래(?)로 평가하며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다.

- 나의 아버지는 중국에서 새로운 사상을 품고 귀국하여 가장 가깝게 지내던 유홍기(대치)에게 중국에서 가져온 많은 서적을 주었다. 후에 두 사람은 사상적 동지가 되어 서로 만날 때마다 자국(조선)의 형세가 풍전등화같음을 탄식하며 언젠가는 일대혁신을 이루지 않으면 안됨을 상의하곤 하였다. (오세창일기)

오세창은 한발짝 더 나아가 유대치가 조선개혁의 방법을 묻자 우선 동지들을 북촌(양반촌)의 자제들 중에서 모아 혁신의 기운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조언을 했다는 언급까지 한다. 차후 유대치의 행보는 오세창의 말과 부합한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이 기록에는 한자락 깔려 있는 무엇이 있다.

오경석이 1879년 47세의 나이로 죽어 갑신정변의 중심에 서지 못하면서 상대적으로 유대치의 모습이 부각되고 있음을 아들의 입장에서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들의 입장에 서 있는 오세창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이 글은 중립적이지 않다.

갑신정변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개화파의 법통인 유대치-김옥균의 계보를, 오세창은 오경석-김옥균으로 만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균?"

유대치가 다시 한번 김옥균을 채근했다. 그때서야 김옥균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먼저 사분오열된 세론을 통일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망일 터입니다."

김옥균이 단호하게 말했다. 간단명료했다.

"봄날의 논판의 개구리 놀 듯하는 세론을 어찌 통일한단 말인가?"

유대치가 반문을 했다. 조선의 국론은 한마디로 중구난방이었다. 왕권파, 개화파, 수국파, 중도파 등 조선의 국론은 정치제파의 이익에 따라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한마디로 고삐 풀린 망아지의 작태와 다름없었다.

"국체의 중심에 우리가 서야 합니다. 우리 개화당이 국체를 틀어쥐지 않는 한 조선을 개화시킬 수 없습니다."

"... ...!"

"끄응."

김옥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좌중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좌중은 침묵상태였다. 일순간 찬물을 덮어쓴 표정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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