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다시 보자 공주 인물, 고려 초 5왕의 정진국사(靜眞國師):
[기획] 다시 보자 공주 인물, 고려 초 5왕의 정진국사(靜眞國師):
  • 석용현 기자
  • 승인 2020.09.14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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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혈사지 그곳엔 길이 없다, 공주시 행정역량이 요구?

공주시는 매달 공주의 인물을 선정해 역사적 평가와 함께 기리는 예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직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한 신라 말· 고려 초 5임금의 왕사를 역임한 정진국사 왕긍양의 출생지 백제유적 남혈사지를 탐방해본다.

정진국사는 지금의 충남 공주 출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공부보다는 시와 글씨, 그림 등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지며, 15세에 이르러 부모에게 출가의 뜻을 밝힌 그는 공주 남혈원(南穴院) 여해선사(如解禪師)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스무 살에 계룡산 보원사(普願寺)에서 계를 받았다고 한다.

충남 공주시 백제 4혈사지(동서남북의 혈사지) 가운데 하나인 남혈사지 출신으로 신라 경순왕과 고려 초 4왕의 국사로 활동한 정진국사 긍양(878~956)은 경북 문경시 봉암사에 정진대사 원오탑이 있다. 이 원오탑은 고려시대의 부도로서 보물 제171호. 높이 5m. 신라 말기 승려 왕긍양(878-956)의 사리탑이다.

정진국사는 어려서 출가하여 공주시 동서남북 4혈사지의 남혈원(南穴院), 지금의 남혈사지에서 여해(如解)의 제자가 되었고, 서혈원(西穴院) 양부(揚孚)의 법을 이었다. 899년(효공왕 3) 당나라에 건너가 석상경제(石霜慶諸)의 제자인 곡산도연(谷山道緣)을 만나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곡산도연(谷山道緣)에게 석상(石霜)의 종지(宗旨:으뜸가는 가르침)에 대해 물었는데, “대대로 일찍이 계승되지 않았다.”는 곡산의 대답에 긍양은 마음의 눈을 뜨고 깨침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일찍이 전한 적도 없는 본래의 참 마음, 즉 불성(佛性)이 자신 안에 있음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깨치게 된 것이다.

정진국사는 오대산·운개(雲蓋)·동산(洞山) 등지를 순례하며 진리의 편력을 마친 뒤, 924년(태조 7) 당나라 유학 후 귀국하여 경기도 광주의 백암사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진작시켰다. 경애왕은 그의 덕을 찬탄하여 서신과 함께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935년(경순왕 9)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를 중창하고, 양부의 뒤를 이어 그곳에 머물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정진국사는 고려왕실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어 태조·혜종·정종·광종의 존숭을 받았으며, 특히 광종은 그를 청하여 궁중에서 재(齋)를 베풀고 자문을 얻고자 개경의 사나선원(舍那禪院)에 머물게 하고, 증공대사(證空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고려 태조는 물론 혜종, 정종, 광종 또한 긍양을 스승의 예로서 대하였다. 특히 광종은 그를 ‘희양산의 화신보살’로 추앙했으며, 긍양이 입적한 후에는 정진대사(靜眞大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 원오지탑(圓悟之塔)이라 했다.

그는 중국 청원계(靑原系)의 선교일미사상(禪敎一味思想)을 계승하여 단순히 선만을 지향하지 않고 ≪능가경 楞伽經≫·≪화엄경≫을 열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선교관은 “색과 공은 다르지 않고, 말과 침묵은 같은 것이다(色空無異 語默猶同).”라는 그의 사상을 증명하기 위하여 정종이 새로 찍은 ≪화엄경≫ 8질을 그에게 보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융합적 이해의 태도는 기존의 교학을 버리지 않는 선, 민간신앙까지도 포섭하는 융선적(融禪的)인 남악계의 전통을 보여준다. 특히 선의 고유성과 배타성을 강조하는 순선적(純禪的)인 북산계(北山系)와는 달리 신라적인 선풍을 유지하며 수선하는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이다.

법맥은 혜능(惠能)-남악(南嶽)-마조(馬祖)-창주(滄洲)-정현(鼎賢)-도헌(道憲)-양부-긍양으로 이어진다. 사리탑과 비문은 보물 제171호와 보물 제172호로 지정되어 문경 봉암사에 봉안되어 있다.

도헌이 봉암사를 창건했을 당시 이곳은 북종선의 요람이었지만, 손자인 긍양이 도량을 재건하면서 봉암사는 남종선을 전파하는 중심 사찰로 변모했다. 그런데 그가 진리의 할아버지인 도헌의 이름으로 희양산문을 열면서 정체성의 문제가 발생한다. 할아버지는 북종선의 선사였지만, 손자는 남종선의 선사였기 때문이다.

정진국사는 도헌이 혜은으로부터 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진감혜소로부터 법을 전수받았다고 남종선의 고승인 혜소를 끌어들여 산문의 연결고리로 삼았다. 이는 스승과 남종선 모두를 살리려는 그의 고뇌가 만든 지혜다.

정리하면 정진국사 원오탑이 있는 봉암사에 걸려있는 연등은 모두 흰색이다. 하얀 바탕에는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도헌이 느림의 북종선을 담았다면, 긍양은 빠름의 남종선을 담았다.

그러나 둘 다 방향은 한 지점, 바로 견성(見性)이라는 선(禪)의 목표를 향하고 있다. 오늘의 문제는 공주 출신 고려 초 5왕의 정진국사가 출생 수행한 곳, 공주시 금학동 백제시대 문화유적지 남혈사지로 가는 명소 길은 아직도 자물쇠로 굳게 잠기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공주시민과 방문자들이 언제나 자유로이 탐방하여 정진국사의 지혜를 배울 기회의 길이 없다는 점이다. 참 아프고 매우 아쉬운 일이다.

세계문화유산의 문화도시를 유별나게 홍보하는 공주시 관광의 메아리는 한마디로 공염불에 불과한 외침일 뿐이다.

2019년 봄, 김정섭 공주시장님의 년도 순방에 금학동 주민에 의한 정책질의에 대한 문제해결은 언제나 추진될 것인가?

김 시장의 행정력 시험대에 대한 평가, 실천행정을 공주시민은 기대해본다.

이러한 문제해결을 위한 공주시 정책당국의 열정과 의지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수백 년 전부터 공주시민의 공주대간 관습도로로서 탐방코스이자, 월성산 봉화대로 오가는 금학동 주민들의 건강을 위한 걷기코스의 길, 백제문화유적지 남혈사지의 진출입로가 하루빨리 열리길 공주시민과 함께 희망해본다.

공주시 문화유산의 관리와 가치, 그리고 문화유적 활용에 대한 오늘의 현주소다.

<참고자료: 박윤진 저, 고려시대 왕사·국사 연구,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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