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210회/ 30장 최후의 증인 (7)
[연재소설 청룡도] 210회/ 30장 최후의 증인 (7)
  • 이 은호 작
  • 승인 2020.08.1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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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군의 마지막 작전은 적장의 저격이었다. 병법 육도(六韜)는 적은 수로 많은 수의 적을 치고 약한 힘으로 강한 힘의 상대를 치는 데는 기습이 최선이라 한다. 육도는 기습을 할 때는 해가 떨어지는 시간을 택해 좁은 길목이나 좁고 얕은 공간에 상대가 있을 때를 기다려 공격하라 말한다. 육도는 무경칠서 중의 하나로 '태공망'이 지은 병서다.

반군의 저격작전도 병법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관군의 주장이었다. 비록 이효헌이 양서순무사로 총책임자였으나 8천400명의 관군의 제병관은 중군 윤효원이었다. 윤효원의 군막은 이중목책으로 되어 있고 막사까지 목책으로 방어가 되어 있어 저격병이 그에게 접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윤효원은 순무영군을 일사천리로 지휘했다. 박기풍 때의 다소 산만함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군기가 일신되어 있었다. 전장에서 장수가 제병을 통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작전 중 제병관이 바뀐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윤효원은 순식간에 28개 부대로 나뉜 크고작은 연합군을 순무영의 깃발 아래 모은다.

조선군은 임진왜란 이후 1만 명의 영(營)급 부대를 움직여 실제의 작전을 벌여본 적이 없다. 강홍립군이 1619년 '살이호산' 작전 참가가 거의 유일할 뿐이다. 강홍립은 1만3천을 좌영, 우영으로 편성해 1619년 2월 압록강을 넘어 작전지역으로 이동한다. 조선군에는 감독관으로 명의 장수 '우승은'이 참가하고 있었다. 우승은은 시간의 촉박을 이유로 조선군의 행군 속도를 재촉한다. 그만큼 전쟁 상황이 안 좋았다.

강홍립은 이동속도를 최대한 빠르게 하기 위해 식량과 중량이 나가는 전투장비를 버리는 방법을 택한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조선군은 밤낮을 달려 명군과 청군이 교전을 하고 있는 살이호산에 도착하면서 청군의 길목작전, 즉 매복에 걸려 섬멸에 가까운 타격을 당한다. 1만3천 명의 부대가 불과 수천 명이 남는 참패였다. 이 작전외 조선군이 벌인 큰 작전은 홍경래난이 거의 유일하다.

효종 때의 나선정벌이나 삼수작전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수백 명의 소규모 작전이다. 윤효원은 전략가였다. 그 또한 정조가 키운 인물이다. 이런 윤효원이 하루종일 서로 총격을 가하고 있는 전쟁터에서 중군장의 깃발이 꽂힌 군막에서 잠을 잘 리가 없다.

손자병법은 나의 잠을 너의 잠자리에서 잔다고 말한다.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넌다는 말이다. 그날 밤 윤효원의 군막을 습격한 춘대와 수명의 특공대는 모두 도륙이 된다. 춘대의 목이 장대에 걸린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춘대의 죽음과 작전의 실패는 정주성을 최대한으로 가라앉게 했다.

"휴!"

홍경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우군칙이나 장봉사 등도 마찬가지였다. 관군지역의 움직임은 조용했다. 홍경래는 춘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시시각각 그의 앞에는 당면하는 일들이 너무도 다급했던 탓이다. 여명이 깃드는 시간이었다. 홍경래는 잠깐 잠결에서 천둥소리를 들었다.

꽈르릉.

꽈르르릉... !

땅이 꺼지고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이 4월18일 새벽이었다. 소리가 난 곳은 북장대였다.

*주. 윤효원- 본명은 유효원 소설이지만 명예손상을 염려하여 성씨를 살짝 바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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