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일제 강점기 독일한인사회
[기획]일제 강점기 독일한인사회
  • 윤영상
  • 승인 2020.08.04 17: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럽한인총연합회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럽 한인 이주 100년사를 정리하고 지난 5월 ‘유럽한인 100년의 발자취’를 발간해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 독일, 영국의 한인 100년 발자취 이외에 유럽 23개국 한인 100년사를 정리면서 중요한 역사자료가 됐다.  유제헌 유럽한인총연합회장은 발간을 기념하며 본 기자에게 책자를 직접 독일에서 우편으로 보내왔고 내용을 투데이충남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 편집자주-

1. 일제강점기 프랑스 한인사회

2. 일제강점기 이후 프랑스 한인사회

3. 일제강점기 독일 한인사회

4. 일제강점기 이후 독일 한인사회(상)

5. 일제강점기 이후 독일 한인사회(하)

6. 일제강점기 영국 한인사회

7. 일제강점기 이후 영국 한인사회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독일로의 한국이민사는 독립운동을 하던 지식인들의 망명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초창기 한인들이 독일에 들어온 목적은 일제 강점기 일본의 침탈과 자주국가임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에서는 민족혼을 담은 유능한 인재를 키워내기 위해 해외유학을 보내는 운동이 활성화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기미육영회’를 통해 이뤄졌다.

이 당시 독일에는 ‘기미육영회’를 통해 안호상과 이극로 등이 보내졌다. 물론 자비로 유학한 학생들도 상당했지만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 양성과 민중계몽을 위해 조직적 차원에서 독일에 보내졌다는데 그 의미를 더 할 수 있다.

이후 앞서 프랑스 100년사에서 정리했듯이 중국 유학생틈에 21명의 한인 유학생들이 1920년 12월 프랑스에 도착해 유럽 각지로 유학길에 올랐는데 독일에도 유학생이 들어오며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독일에서의 한인단체

◈유덕고려학우회

유덕고려학우회는 독일에서 유학생 중 김갑수, 윤건중, 이의경 등 11명이 주축이 되어 베를린에 1921년 1월 1일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임시정부지원활동, 대외선전활동을 비롯해 유학생들의 구제활동, 국제대회 참가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특히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이극로, 이의경, 황우일을 대표로 파견해 대한민국 독립의 당위성과 일제 침탈을 알렸다.

또한 한인회보를 발행해 재독한인의 동향과 국내외 소식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포츠담 한인 구락부

1920년에 결성된 포츠담 한인 구락부는 당시 이곳에 30여명이 체류하고 있었고 조선의열단 단원들도 이곳에서 활동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조선의열단 단원으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상해 황초단 부두에서 처단했던 오성륜도 독일로 피신해 포츠담을 중심으로 활동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이 당시 포츠담에는 한인식당이 있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한인들이 활발한 대한독립을 위한 활동을 했다.

대표적 활동으로는 매년 1910년 한일합병 조인이 공식 발표된 8월 29일을 국치일을 삼아 매년 추모식을 거행했으며, 1923년 8월 일본 관동 대지진으로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대량학살에 대해 전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독일에서 활약한 인물

◈한국학 태동을 주도한 이극로

이극로는 영화로 잘 알려진 ‘말모이’에서 조선어학회 대표로 나온 윤계상이 역할로 알려져 있다.

이극로가 독일에 오게 된 계기는 당시 임시정부 국무총리였던 이동휘를 안내하고 통역하기 위해 유럽을 통해 모스크바 여정을 함께 하면서 독일에 오게 되었다.

베를린 대학 철학부에서 정치 경제학과 언어학을 전공한 이극로는 동양학과에 소속되어 독일 최초로 한국어 강의를 시작했다.

이후 1927년 귀국길에 올라 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 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활동하다가 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널리 알린 서양화가 배운성

배운성은 서울 명륜동 태생으로 가정생활이 어려워 경성중학교 급사로 일하다 서울 부호였던 백인기가 서생으로 들인다.

배운성은 백인기의 아들 백명곤이 이로본으로 유학을 가는데 동행을 해 와세다 대학에서 2년간 경제학 공부를 하게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이후 백명곤이 베를린으로 유학 갈 때 몸종으로 따라가 1922년 3월 17일 베를린에 도착한다. 하지만 백명곤은 건강이 좋지 않아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배운성은 베를린에 남아 국립예술종합대학에 입학해 평소 원하던 미술공부를 시작한다.

페르디난트 슈피겔 교수아래 회화공부를 했고, 초기 수없는 엽서와 목판화에 한국의 전통과 풍속을 담았다.

당시 한국에 대해 무지했던 유럽인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한국의 정취를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유럽 곳곳에서 주목을 받는데 파리 살롱도튼느전 입선, 33년 바르샤바 국제미술전시회 1등상 등 주요 미술전 수상과 유럽 각지에서 작품전시 활동을 했다.

귀국 후 친일미술가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참여하는 등 친일 행각으로 비판받았고 가족과 함께 6.25 전쟁 중 월북하여 1978년 신의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독일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이의경

황해도 해주 출신 이의경은 1927년 뮌헨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를 받은 후, 31년 본격적으로 독에서 문학가로 활동했다. 자전적 소설인 ‘압록강은 흐른다’를 독일 문단에 출간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당시 이의경은 ‘이미륵’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된다.

이의경은 3.1운동에 가담해 일경에 쫓기다 상해로 피신해 안중근 가족의 도움으로 상해임시정부 청년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유럽 유학을 준비했다.

빌헬름 선교신부와 안봉근의 도움으로 1920년 독일의 뷔르츠부르크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이의경이 독일인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나치정권 당시 반나치 지하조직인 ‘백장미’라는 단체에 평소 친분을 쌓고 있었던 쿠르트 후버 교수가 깊게 관여하면서 직간접적으로 협조 했다.

이들은 나치 비밀경찰에 체포외어 사형당하는데 후버교수도 이때 사형당한다. 독일 근대사에 중요한 인물인 후버 교수는 고향 그레펠핑시에서 후버 광장을 만들고 동판도 부착하는데, 그레펠핑시가 이의경을 반나치정권에 반기를 든 운동가로 받아드렸고 후버광장 오른편 담벽에 이의경 동판을 부착했다.

◈미국 장교신분으로 독일로 건너와 활동한 독립운동가 황기환

프랑스 일제강점기 한인사회에서 언급했듯이 황기환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으로 있으면서 한인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1918~1919년 미군장교자격으로 베를린에서 근무했다.

1904년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1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에 자원입대했다가 미군 장교 자격으로 베를린에서 근무하게 된다.

파리 위원부 서기장 활동중에 이승만에 의해 미국으로 송환되어 독립운동을 하다 1923년 4월 심장병으로 40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황기환은 2018년 국내 TV 드라마로 제작되어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 실제 모델로 알려지기도 했으며 작년 뉴욕으로부터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독일과 프랑스는 국경을 맞대고 있어 독립운동을 했던 유학생이나 그 외 목적으로 왔던 한인들이 나라를 오가며 활동해 왔다.

독일의 경우 ‘포츠담 구락부’나 ‘유덕고려학우회’처럼 한인들의 독립운동 활동이 좀 더 조직적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의경처럼 최근에서야 활동이 발굴되면서 독일인들에게도 인정받아지듯 당시 독립운동을 활동을 했던 유학생 또는 의혈단 활동이 정부 지원아래 발굴되고 고증되어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