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204회/ 30장 최후의 증인 (1)
[연재소설 청룡도] 204회/ 30장 최후의 증인 (1)
  • 이 은호 작
  • 승인 2020.08.04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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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혹한의 날씨는 반군과 관군 양쪽에 지옥과 같은 전장 상황이었다. 성벽을 지켜야 하는 반군도 힘들었지만 허허벌판 위에 막사를 설치하고 야영을 하는 관군은 지옥과 같은 날들이었다. 관군은 1월5일 성을 포위한 후 3월말까지 수십 차례 크고작은 공격을 가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반군의 피해도 자심했다.

반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했다. 두달 정도의 식량이 문제였다. 3월말경에 와서 성안의 식량사정은 거의 바닥이 나 있었다. 이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3월22일 반군이 벌였던 작전이 실패하면서 정주는 깊은 시름에 빠진다. 홍총각이 이끈 부대가 야습에 나섰다가 관군의 매복작전에 걸려 70명이 죽고 87명이 생포된 것이다.

관군은 생포한 87명의 포로를 성의 동문 앞에서 전원 참수를 하여 멀리서 이 장면을 접한 반군을 경악에 떨게 한다. '관서평란록' '순조실록'은 이날 성안에서 호곡하는소리가 하늘과 땅을 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설득전과 협박전을 유효적절하게 사용하는 윤효원의 전략은 성안의 사기를 급격하게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윤효원의 전략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윤효원은 작은 부대를 몇개 꾸려 성의 서쪽과 남쪽을 연일 공격했다. 그러나 공격은 허상이었다. 관군은 성벽을 타고 넘는 공세적 공격이 아니라 성벽에 접근해 조총과 화살을 발사하는 정도의 공세로 반군의 시선을 고정시킨 후 순무영 화대(火隊)를 비밀리에 가동하고 있었다.

순무영 화약부대는 평안도 일대의 광산의 땅굴 파는 기술자들을 끌어모아 정주성의 북문 앞에 작은 엄폐호를 파고 땅굴을 파고 있었다. 성안은 전혀 이 작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관군의 양동작전이 주효한 탓에 북문 밖을 세밀하게 살피지 못한 탓이다.

반군은 하루가 멀다하고 하던 막료회의도 며칠째 거르고 있었다. 홍경래의 막료들 모두가 현장에 나서야할 만큼 일선이 위급했다. 관군은 북문을 제외한 삼문을 날마다 두드리고 있었다. 반군도 밤이면 수없이 야습에 나섰다. 그러나 야습은 전혀 효과를 볼 수 없었다. 관군이 목책문을 걸어 잠그고 대항을 하지 않은 탓이다.

조선 야전군은 목책을 매우 잘 활용했다. 목책은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 전통적인 군사장비다. 정주성을 포위한 관군은 28개의 크고작은 부대를 목책으로 영(營)을 만들고 작전에 임하고 있었다. 목책의 설치와 효과를 기록한 '금문영등록'이다.

-포루(포대)는 성을 지키는 방책이다. 그러나 일이 급할 때 꼭 돌만 고집할 필요없다.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어 사방을 둘러 막으면 방패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곳곳에 구멍을 뚫고 조총과 활을 쏠 공간을 확보하고 적을 맞으면 한때의 위급을 면할 수 있다. 성 바깥에서 공격전을 전개할 때도 목책은 더욱 유용하다. 야전에서 숙영지를 보호하고 아군의 심리를 안정시키는 데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

정주성의 목책은 '순무영진도'로 확인이 된다. 목책의 숫자가 28개라는 기록은 '이병도'가 어느 책장사에서 구했다는 '정주성공취도'를 근거로 나온 말이다. 조선군의 영(營)은 많은 사료에 보이지만 목책이 영을 지키고 보호하는 담장 역할을 했다는 것을 필자도 정주성싸움에서 처음 알았다.

필자는 목책이 주로 고정식 전투지역에서 활용한 장비로 알았었다. 그러나 정주성에서 보듯 조선군은 별도의 목책부대를 운용할 정도로 기술적 노하우를 갖고 이동식 개폐식 장비로 활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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