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194회/ 28장 순무영(巡撫營) (5)
[연재소설 청룡도] 194회/ 28장 순무영(巡撫營) (5)
  • 이 은호 작
  • 승인 2020.07.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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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 12월27일 정오부터 해질 무렵까지 계속된 송림전투는 사실상 홍경래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른 주도적 전투였다. 홍경래군은 이 전투에서 예봉이 꺾이고 만다. 이 전투는 홍경래군의 미래를 결정하는 전투였다. 반군 전체의 사기는 물론 홍경래군의 봉기에 긴가민가하던 서북의 민심을 단숨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돌려 놓게 된다.

홍경래는 첫 전투를 너무 한가하게 생각했다. 이 전투의 상보는 관서평란록, 진중일기, 서정일기 등보다 조선실록에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규모 전투가 아닌 부분적 전투가 국가의 정식 사서에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된 경우도 많지 않다. 보고자는 전쟁을 지휘했던 이해우이고 수록날짜는 1812년 1월1일자다.

- 출전했던 장령(將領) 등이 보고하기를, ‘29일 좌영장(左領將) 함종 부사(咸從府使) 윤욱렬(尹郁烈)과 우영장(右領將) 순천 군수(順川郡守) 오치수(吳致壽)가 각각 4초(哨)를 거느리고 전진(前陣)이 되고, 우후(虞候) 이해승(李海昇)이 2초를 거느리고 후진이 되어 송림동(松林洞) 어구의 풍진(楓津) 언덕 위에 나누어 주둔하였습니다. 그러자 적병(賊兵) 한 가닥은 전진의 뒤로부터 둘러싸며 나오고, 또 한가닥은 전진의 앞에서 그림자를 드러냈으며, 또 한줄기는 적현(赤峴)으로부터 풍진의 건너편으로 둘러싸고 나오면서 후진으로 와서 핍박하였는데, 그 사이는 1백 보에 불과하였습니다.

후진과 전진은 서로의 거리가 비록 멀지는 않았지만, 후진의 세력이 단약(單弱)하여 서로 대적하기 어려울 즈음에 곽산 군수(郭山郡守)가 원군을 이끌고 뒤에서부터 들이닥쳤으므로, 기수(旗手)에게 지시를 내려 북을 울리며 급히 나갔더니, 적병이 처음에는 서로 대항하려 하다가 원군이 뒤에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는 무너져 달아났고 기병·보병 모두가 산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전진에서 적이 패배해 달아나는 것을 보고 하나로 에워싸고 송림동 안으로 들어가 숨어 있는 적도들을 뒤쫓으면서 산골짜기를 두루 뒤졌습니다.

그래서 전진과 후진에서 참(斬)한 적의 수급(首級)이 수백여 급이요, 생포한 자가 30여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적괴(賊魁)는 앞에 큰 깃발을 세우고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지극히 흉악하고 사납게 굴었는데, 거의 추격해 죽일 뻔하였으나, 목숨을 내놓고 날쌔게 달아나는지라 우리 기병이 미칠 수가 없었으나, 그놈이 내팽개친 깃발과 북은 모두 습득했습니다. 송림의 서쪽 일대의 촌락은 적들의 소굴이 되었기 때문에 모두 불을 놓게 하였습니다.

군사들을 재촉하여 전진하여 박천(博川) 나루에 이르자 날이 이미 깜깜해졌으므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우선 주둔하여 다음날 아침을 기다려 나아가 싸우고자 하였으나, 적괴의 어미와 아낙이 나루 앞 촌가(村家)에 와서 살고 있었으므로 곧장 불을 놓았더니 흉적(凶賊)이 그 권속(眷屬)들을 데리고 달아났고, 한식경쯤 지나 곧장 정주성(定州城)으로 향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적병의 총수는 1천여 명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고, 이른바 적장은 정확하게 몇이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잡혀서 참수된 자들 가운데서 복색으로 보건대, 4, 5명이 군졸들의 모양과 조금 달랐습니다. 그리고 군사를 출동시킬 때 비록 우후와 두 영장이 부(部)를 나누어 병사들을 거느리게 했습니다만, 적의 세력은 헤아리기 어렵고 군대는 기이한 계책을 내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지라, 곽산 군수 이영식(李永植)을 원군으로 삼아 뒤를 이어 내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전에 이미 감률(勘律)할 것을 청했는데, 이번에 군사를 거느리게 했으니, 지극히 두렵고 고민스럽습니다만, 공을 세워 스스로 보답하고자 하는 것이 곧 그의 소원이고, 또 군사를 거느릴 사람이 부족했기 때문에 출전하여 나아가 싸우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군졸들이 비록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거개가 피폐하고 잔약하여 믿을 만한 사람이 없으니, 영하(營下)와 다른 고을의 장교 가운데서 여력(膂力)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자 40명을 가려뽑아 장사 군관(壯士軍官)이라 이름하여 말을 타고 선봉이 되게 하소서. 이번에 송림에서 먼저 격파한 것은 족히 미친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것이니, 참으로 심히 다행입니다.


이해우의 보고는 전투의 상황과 홍경래군의 동향 그리고 자신의 직권으로 군졸을 나누어주어 전공을 세우게한 이영식에 대한 내용 등이 자세하다. 전쟁을 치루는 급박한 시기에도 조정에 이런 전투상보를 보내고 그것을 자료로 남길수 있던 것이 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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