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181회/ 26장 위수령 (6)
[연재소설 청룡도] 181회/ 26장 위수령 (6)
  • 이 은호 작
  • 승인 2020.07.0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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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정조의 꿈을 이해한다. 정조의 고통스러웠던 세손시절도 이해한다. 비정한 정치투쟁의 암투 속에서 살아남아 군왕이 되어 취약한 권력기반을 강화하고 무도한 아버지의 원수들에 대한 감정도 이해한다. 그리고 인간 정조의 자질과 품성도 인정이 된다.

그리고 바둑인으로 정조를 고맙게 생각한다. 한반도에 군림하던 수백명의 군왕들 중 직접 옥음(玉音)을 내어 바둑을 시로 노래한 사람은 정조가 유일하다. 하여 필자는 정조를 더욱 애틋하게 생각한다.

정조는 조선 28명의 군왕들 중 가장 학자에 가까운 군왕이었던 것은 맞다. 아니 당대의 최고 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정조는 25세의 역강한 나이로 군왕이 되었다. 정조는 오랜 세손 생활과 특유의 독서욕과 학문의 습득 능력으로 역강한 나이에 당대의 학자가 되어 있었다.

정조는 4살 때(1755) 남유용으로부터 '소학초해'를 배우고 다음해 '서지수' '김양택'으로부터 '동문선습'을 배웠다. 소학초해와 동문선습으로 기초적 한문을 습득한 정조는 왕세손이 된 후 홍봉한과 당대의 산림의 영수 '김원행' '송명흠'으로부터 본격적인 학문을 배우게 된다. 홍봉한 김원행 송명흠 등은 이이-송시열-이간으로 이어지는 노론 낙론계의 학자들로 정조 또한 은연 중에 노론 낙론의 학풍에 젖어들게 된다.

정조는 1762년경에 효경, 소학, 논어, 맹자, 시경을 독파하고 사단칠정에 대한 이해를 얻는다. 나이 11-12세 때다. 정조는 18세가 되던 1772년부터 스스로 저술 활동에 나설 정도의 학문의 깊이를 얻고 삼비, 오전, 구구, 팔색, 구류, 백가를 모두 통독, 왕위에 오르던 25세 때는 당대의 학계를 주도할 만한 학자의 반열에 올라선다.

정조가 자신의 일기인 일득록에 스스로 문왕의 후계자요 조선 산림의 영수로서 공맹의 법통이 자신에게 있다고 자신할 정도의 자부를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다.

정조가 조선의 군왕들 중 바둑에 가장 관심이 적었던 인물임은 필자의 칼럼 [조선사바둑전]에서 피력한 바 있다. 아울러 정조가 바둑의 문외한은 아니었다는 말도 한 바 있다. 승정원일기 속에 정조는 바둑을 몇번 언급한다. 자잘한 정사의 설명 속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정조는 바둑시를 한 수 남기기도 한다. 홍제전서에 수록된 시다.
碁.

하얀 댓자리 붉은 주렴에 해는 더디지네.
땅땅 바둑돌 놓는 소리 도끼자루 썩는 시간일세.
높은 누각에 손님 모시고 꽃그늘은 고요하고.
만가지 일들도 한판 바둑에 달렸구나.

(銀簟紅簾午景遲/丁丁落子爛柯時/高樓留客花陰靜/ 萬事輸贏一局棊)
정조는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했다. 월인천강(月印千江) 즉 달이 천개의 강에 비추듯 자신은 천개, 만개의 강을 비추는 세상의 주인이란 것이다. 지독한 자기 확신이며 오만이다.

위의 시는 바로 그 사람 정조가 지은 바둑시다. 제목 또한 '바둑(碁)'이다. 조선의 군왕들, 아니 고려 삼국을 통털어 바둑을 제목으로한 노래를 지은 사람은 정조가 유일하다

정조는 많은 강점이 있는 인물이다.능력도 실력도 탁월했다. 그러나 한 나라를 건사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국가가 나아갈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군왕이란 사람에게 주어진 천명(天命)이라면 정조는 그 천명을 잘 알지 못한 군왕 중 한사람이었다는 것이 불초한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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