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178회/ 26장 위수령 (3)
[연재소설 청룡도] 178회/ 26장 위수령 (3)
  • 이 은호 작
  • 승인 2020.06.2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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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경의 강공책은 먼저 곡산민란의 주모자들의 처벌에서부터 힘을 얻고 있었다. 김조순은 곡산민란 처리에 조정의 소극적 대처와 아량을 주장했으나 박종경은 강력한 처벌을 주장했다. 순조는 박종경의 손을 들어준다. 법대로 의법처리하란 결정을 내린 것이다.

기록으로 보이는 곡산부사의 학정은 도를 넘는다. 곡산부사는 '박종신'으로 박종경의 사촌이다. 반남박문의 지원을 받는 입장에서 박종신의 가렴주구는 백성들이 치를 떨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박종신은 부임한 즉시 군민들의 돈을 빼앗는 것을 업무로 했다. 고을사람들 중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사람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수백 냥씩 공출하듯 빼앗았다.

시장에서 한달 6전이던 자릿세를 27냥씩 받아내는가 하면 아전들의 급료까지 강제로 빼앗는 후안무치를 저지르기도 한다. 박종신은 형벌권에서 온간 패악을 저지른다. 절도자나 도살자들이 어떤 동리에서 발생하면 박종신은 기회라 생각하고 그 동리 사람들 전부를 방조자로 보고 벌금을 부과하여 강제징수를 하는 황당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박종신은 벌금징수에 눈이 멀어 있었다. 벌금체납자들이 수시로 끌려와 매를 맞고 죽어나갔다. 사망자가 1백명이 넘어서면서 곡산백성들이 궐기를 한 것이었다. 박종신은 그날 발가벗겨진 몸으로 가마에 태워져 읍내를 조리돌림 당한다. 성난 백성들의 욕과 주먹다짐을 당한 것은 물론이다. 그날밤 곡산 관아가 불타 없어진다.

이 사건의 처리는 순조가 박종경의 손을 들어주면서 끝난다. 곡산백성 중 41명이 참수를 당하고 68명이 관노로 전락 유배시키는 일벌백계(?)의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박종신은 울산으로 유배를 가는 것으로 끝난다. 참으로 조정의 조치가 유치하고 상식에 어긋난 것을 알 수 있다. 안핵사로 내려갔던 홍희신의 감사보고가 희극적이다. 실록에 나오는 기록이다.

-박종신이 가혹한 것은 사실이나 백성들을 불법으로 대한 것은 아니다.

박종신은 울산유배에서 곧바로 풀려나 다시 승승장구한다. 조선의 말세적 모습은 이 사건에 다 나타나 있다. 조선의 언도의 나라였다. 조화와 균형을 덕으로 생각하는 사림정치라는 언로를 열고 개척하며 나라의 틀과 기강을 세우고 존재해온 것이 조선이다. 3백년 동안 계속 되어온 이 조선의 틀이 영정조를 거쳐오며 가문정치라는 괴물적 정치가 생겨나면서 박종신같은 관원이 승승장구하는 비상식(?)이 생겨난다.

박종신보다 15년전에 곡산부사로 내려와 곡산백성들의 칭송과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던 관원이 한명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곡산에서 돌아와 친형 정약종과 인척들이 천주교에 관련된 정치적 곤경에 처하게 되는데 이때 곡산백성들의 탄원이 참작되어 곤경을 벗어나기도 한다.

필자는 조선의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정조라고 본다. 조선멸망의 가장 큰 원흉이랄 수 있는 김조순, 박종경, 조득영을 키우고 육성한 사람이 바로 정조다. 안동김문, 반남박문, 풍양조문이란 세도정치의 씨를 뿌리고 거름을 준 사람이 그 누구도 아닌 정조인 것이다.

연구자들은 정조를 위대한 성군으로 그리기 바쁘다. 그들의 연구는 정조는 조선 르네상스의 완성자요 문화군주로 칭송하기 바쁘다. 어떤 여학자는 정조와 결혼했을 정도로 열심히 그를 연구했다며 아예 정조신(神)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필자는 이런 의견들에 동조할 수 없다. 필자가 본 정조는 엄청난 독선과 자기만족에 빠져 살던 독존적 천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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