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韓-中 우의공원 건립
[기획] 韓-中 우의공원 건립
  • 윤영상
  • 승인 2020.05.26 16: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육사 청동상
  독립전쟁 영웅 5인의 흉상이 육군사관학교 교내 충무관 앞에 세워졌다. 흉상은 생도들이 사용한 실탄의 탄피 300㎏을 녹여 제작했다. 5.56㎜ 소총탄 5만발 분량이다.
  2018년 3·1절 99돌을 맞아 이들 독립전쟁 영웅 5인의 흉상을 제작해 제막식을 하였다. 항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의 흉상이 육군 사관학교에 세워졌다. 제막식에는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과 이종걸 국회의원, 지청천 장군 외손자인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등 독립유공자 후손들과 학교 관계자, 생도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흉상 제작에 든 실탄의 탄피 300㎏는 총과 실탄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지만 봉오동·청산리 대첩 등으로 조국 독립의 불씨를 타오르게 한 선배 전우들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육군은 밝혔다. 흉상 중앙에 설치된 표지석 상단에는 독립군의 의지가 담긴 ‘압록강 행진곡’ 가사를 새겨 넣었다. 다만 독립전쟁 영웅을 표식화 하려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거꾸로 전쟁영웅을 잊어가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억해보면, 1962년 대한민국 건국헌장 국민장 추서. 1999년에는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교육사업 활동에 힘쓰고 있으며, 2013년 8월에는 대한민국 해군 손원일 급 잠수함 중 4번함이 장군의 이름을 딴 ‘김좌진함’으로 명명되었다.
  2014년 12월 충남대학교 팀이 송상도의 ‘기려수필’(騎驢隨筆, 망국의 한 기록으로 꽃피우다) 전4권을 국역, 학술대회를 영주에서 가졌다. 일제 식민지치하의 역사 기록으로는 황헌의「매천야록」과 송상도의「기려수필」뿐인데, 이에 대해 대구 경북의 대학들이 ‘우리 지역이 해야 할 일을 충청의 충남대가 했다’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충남대의 입장에선 그 내용에 독립군의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 고종의 밀사로 파리에 파견한 이상설, 1932년 일본 국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 등 충청지역 인사가 많았기에 그리된 연유로 자부한다.

◈ 청산리 역사 대장정
  김좌진장군 기념사업회와 국가보훈처에서는 청산리역사대장정 행사를 통하여 역사에 길이 남을 청산리독립전쟁의 영웅이신 김좌진장군과 수많은 항일 독립선열들의 독립투쟁정신과 민족혼을 오늘의 청년세대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다. 이 행사를 통해 항일독립투쟁을 펼쳤던 중국 북만주일대의 유적지 및 전적지를 직접 탐방하여 우리 젊은 세대들이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과 청년정신을 함양시키고 용기와 도전정신을 함양하는 데 있다. ‘인간’ 김좌진을 알아보고 공부하는 뜻깊은 학습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백야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본받게 될 것이다.
  겨레의 혼이 담긴 청산리를 통해 역사를 배우고 스스로 탐구하는 힘을 키울 것이며 친구들과 함께 함으로써 협동심을 배우게 될 것이며 동북아시대를 열어갈 주역으로서 도전정신을 함양하는 데 있다. 중국 동복3성 북만주일대 1만 리 길의 항일독립투쟁 전적지, 웅혼의 고구려, 발해 유적지 탐방으로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문화가 실재하고 있는 고구려·발해 유적지를 직접 탐방하는 체험을 한다.
  청산리독립전쟁 영웅인 김좌진장군과 수많은 항일 독립선열들의 민족혼을 젊은 세대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매년 청산리 역사대장정대가 출정했는데 올해는 코로나19로 막혀 있다.

◈ 추승
  홍범도 장군의 유해송환을 앞두고 있다. 스탈린 정권에 의해 크질오르다로 강제로 이주 당하신 탓이다. 두 해가 지나도록 아직도 강제징용배상판결이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일본내각을 보면 마지막 연재는 오히려 필자가 독자에게 게으르다 심문을 받는 느낌이다. 충청인 들의 애국정신에 부끄러움은 없는지 뒤돌아보게 한다. 일본군에게는 ‘날아다니는 비장(飛將)’으로 발군의 사격술을 자랑했고, 유격전마다 비범한 전술을 발휘했다. 300명으로 구성된 산포수의병대의 대장으로 1907년 이후 연전연승의 승첩으로 함경도 백성에게는 축지법을 구사하는 신출귀몰의 유격장으로 알려진 홍범도 이었다. 1919년 3월 17일 수립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에 참가하여 이동휘와 함께 군무부를 창건하고 400명 대한독립군의 사령관 선출되어 일성을 외쳤다.
 「대한독립군 유고문(諭告文) 1919, 12)」에 “당당한 독립군으로 신(身)을 탄연포우(彈煙砲雨) 중에 투하야 반만년 역사를 광명케 하고, 국토를 회복하야 자손만대에 행복을 여(與)함이 아(我) 독립군의 목적이요 또한 민족을 위한 본의라.”고 썼다.
  혹자는 독립운동 연차가 높고 경력이 오래 된 홍범도 장군이 실제 청산리지휘를 하신 게 아니냐는 연구를 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북로군정서 또한 총재는 서일장군이었기에 ‘김장군이 온전히 전투를 총지휘한 것이다’ 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으로 본다 했다. 연변대학 박창욱이 1994년에 쓴 논문에 의하면, 현재 청산리 전투에 대한 대부분 기록은 이범석 장군의 회고록에 기초하여 전투의 실상이 굉장히 윤색된 것으로 보고 있다. 회고록에서 ‘자신이 속했던 김좌진 장군 부대의 공로만을 기록하고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연합부대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며 신빙성을 문제 삼고 있다.
  1923~1924년까지 일제는 ‘김좌진 장군이 일본 측에 귀순하여 앞잡이가 되었다’는 거짓 음해를 선전하여 김장군은 한때 억울하게 친일파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심지어 ‘김좌진이 하얼빈영사관 마쓰시마와 밀담을 나눈 후 공산당원들을 많이 잡아 가두고 죽였기에 암살했다’는 주장까지 조선공산당 계열로부터 나왔다. 거짓 음해에 속아 넘어가 김장군을 암살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지금도 조선족들이 장군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김좌진은 북만주(北滿洲)에서 평판이 묻혔고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이나 「한국의 아나키즘 운동편」 등의 문서들엔 북만주 동포들이 두려워하였고 북만주 동포사회에서 군림하는 것으로 호도되었다.
  1960년대까지 청산리대첩의 주인공을 김좌진 장군이라고 생각했던 지식인들의 인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홍범도 장군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이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다고 해서 김좌진 장군을 끌어내릴 필요는 없다. 이런 내용이 담긴 「김좌진평전」이 나온 바 있다. 일제시대 민족운동을 연구해온 수원대 박환 교수는 ‘청산리대첩(청산리독립전쟁)’ 90주년에 장군의 항일운동과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던 삶에 초점을 맞춰「김좌진평전」을 출판했다.
  - 최근 연변지역의 연구들은 청산리독립전쟁이 홍범도에 의해 주도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홍범도가 청산리독립전쟁 승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김좌진에 대한 언급 없이 홍범도만 언급하는 것은 사상적인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간단한 질문 몇 가지만 해보아도 김좌진을 빼놓고 청산리독립전쟁의 승리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청산리독립전쟁에서 김좌진의 탁월한 지도력이 없었다면? 김좌진이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지 않고 독립군의 양성에 힘을 쏟지 않았다면? 또 서일(徐一)의 의견에 따라 북만주지역으로 갔다면? 청산리독립전쟁의 승리를 떠나, 이 역사적인 전투 자체가 아예 일어나지 못 했을 수도 있다. (「김좌진평전」 94쪽 인용)​  박환의 위와 같은 김좌진 장군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 공감이 된다. 홍범도 장군이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비단 그가 공산당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김좌진 장군은 1920년 청산리대첩 이후에도 10여 년 동안 만주지역을 떠돌며 왕성한 독립운동을 펼친 것에 비해 홍범도 장군은 1925년 이후에는 뚜렷한 활동이 보이지 않았다.
  홍범도 장군이나 김좌진 장군이나 두 분 다 우리의 독립을 위해 힘쓰신 독립운동가인 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이다.

◈ 한중우의공원의 건립
  지난 1998년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를 설립하고 99년도부터 중국 땅에 백야의 거주지 및 순국현장 복원을 한 것을 계기로 해림시에 한중우의공원(무장투쟁역사관)을 건립했다.
  한중우의공원이 위치한 중국 흑룡강성 해림시 일대는 김좌진장군이 항일 무장투쟁과 애국계몽, 교육 운동을 전개했던 지역이며 이 일대에 살고 있는 20여만 명의 중국동포들은 대부분이 항일 독립선열들의 후손이어서 우리의 말과 글을 사용하므로 문화적 여러 가지 차이점을 극복하고 지역 간 역사인물·문화 자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김좌진장군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군들이 주둔하는 곳 마다 설립한 20여개의 학교 중, 아직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학교가 해림시 조선족실험소학교이다.
  이곳, 공원 내 유스호스텔 형식의 백야관은 한중우호 협력과 한국의 전통문화 및 현대식 예식문화 보급, 생활 편의시설 지원, 중국동포 청소년들에게는 중국내에서의 자체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교육지원 역할을 한다. 국내 초·중·고 학생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어학연수 및 역사탐방 등 중국체험캠프가 개설되어 지역愛를 나누고, 또 다른 학습활동을 한다는 자긍심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산시중한우의광장엔 초가와 정미소도 새로 단장되어 있다. 여기 옛 거주지는 백야 장군께서 청산리전쟁 후 생활공간으로 사용한 조그만 초가 두 옥, 장군님께서 순국하셨던 정미소, 마당에는 장군의 흉상이 안치되어 있다. 공원 내의 ‘백야 김좌진장군 기념관’에 들른다.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울게 하리라.’
기념관 내부는 그 유명한 청산리전투를 묘사한 그림을 배경으로 장군의 흉상이 모셔져 있고, 독립군과 항일운동에 대한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도 안치되어 있어 일제에 맞선 독립과 항일운동의 교육 및 홍보 자료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해림시 ‘한·중우의공원’에서 약 1시간이 걸려 발해유적으로 이동해서 백일홍 마른줄기만 서걱대는 발해의 옛 수도 상경용천부의 성터와 궁성지에서 장군의 한시 “斷腸之痛”을 옮겨 적으며 연재를 마무리한다.
  -적막한 달밤 칼머리의 바람은 차기만 한데, 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 생각 돋게 하는 구나
  -삼천리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단장의 아픈 마음 쓸어버릴 길 없구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