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156회/ 23장 운산광산 (2)
[연재소설 청룡도] 156회/ 23장 운산광산 (2)
  • 이 은호 작
  • 승인 2020.05.2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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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홍경래의 난을 연구한 연구논문 십여 편을 살피다 이 논문의 근거가 한편의 소설에 있음을 알고 놀랐다. 논문의 근거가 소설이라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논문 한편이 나오면 기자들의 기사로, 작가들의 소설 등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홍경래는 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1860년대 쓰여진 듯한 한문소설 '홍경래전' 때문이다.

이 한문소설은 단편소설 한편 분량으로 필자와 작성 생성연대 미상으로 조선후기 소설이 융성할 때 독서계를 떠돈 작품이다. 여러 편의 이본 등이 존재하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필자는 소설 청룡도를 쓰면서 작가의 상상력은 되도록 배제하고 사료의 근거와 연구성과만을 활용한다 말한 바 있다. 철종11년에 쓰여진 이 한문소설의 줄거리를 일단 살펴보자.


홍경래는 역사서를 읽다가 세상 출정의 일성을 내뱉는다.

“<사략(史略)>을 읽다가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장사가 죽지 않으면 큰일을 이루고 죽으면 큰 이름을 남긴다’ 같은 대목에서는 반드시 두번 세번 읽고 감탄하며 칭송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홍경래는 12살 때 이미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자객 형가(荊軻)를 애도하는 ‘송형가’(松荊歌)라는 글제를 받고는, “추풍역수장사권/ 백일함양천자두”(秋風易水壯士卷/白日咸陽天子頭)"라 한다.
유학권이 “가을바람은 역수 장사(형가)의 주먹이요, 빛나는 태양은 함양에 있는 천자의 머리이다”라고 해석하자, 홍경래는 “가을바람 부는데 역수 장사의 주먹으로, 대낮 함양 천자의 머리를 친다”라고 바꾸어 해석했다.
모골이 송연해진 유학권은 그 다음날로 홍경래를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온 홍경래는 혼자 경사(經史)를 통독하며 시를 지었는데, 그중에 “달이 뭇 별을 거느리고 하늘에 진을 치니, 바람은 나뭇잎을 몰고 가을 산에서 싸우도다(月將衆星屯碧落/風驅木落戰秋山)"라 하고 있다.

홍경래는 입신양명을 꿈꾸고 평양 향시에 도전 통과한 후 한양으로 올라와 대과에 응시한다. 그러나 대과는 홍경래 같은 지방 출신이 통과할 수 있는 등용문이 아니었다. <홍경래전>은 세도가 자제들은 과장에 가지 않아도 급제하지만 시골 선비는 한갓 노자와 다리 힘만 헛되이 할 뿐이라며, 이들이 낸 답안지는 문벌자제들의 휴지로 사용될 뿐이란 현실을 토로한다. 과거는 경화세족(京華勢族)으로 불렸던 세도가 자제들의 관직 진출을 위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았다. 서북 출신이었던 홍경래의 경우는 여기에 한술 더 떴다.

“이중에서도 평안도 사람들은 더욱 당세에 쓰이지 못했다. 조선 초에는 고려 유민(遺民)이라 하여 위험하게 여겨 쓰지 않았고, 나중에는 천하게 여겨 쓰지 않았다. 서울의 하인배나 충청도의 졸개들까지도 서북인을 ‘사람’(人)이라 부르지 않고, ‘놈’(漢)이라 불렀다. 서북지방의 감사, 수령들이 백성의 재물을 다반사로 토색한 것도 서북민을 내심으로 천시한 까닭이다.”

<홍경래전>은 사마시에 낙방한 홍경래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당일 방에 이름이 오른 자들을 보니 거개가 귀족의 자질(子姪)들이었다. 경래의 노한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감히 위를 범해 세상을 바꿀 결심(改造犯上之心)을 갖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동지 탐색에 나선 홍경래는 가산(嘉山)의 청룡사에서 태천(泰川)의 명가 출신 서얼 우군칙(禹君則)을 만났다. 동지가 된 둘은 가산의 역속(驛屬)으로 있는 부호 이희저(李禧著)를 포섭 대상으로 삼았다. 우군칙의 아내를 점쟁이로 변장시켜 이희저에게 보내 “10년 이내 대운을 만날 것인데, 반드시 수성(水姓)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게 했다.
1년 뒤에는 우군칙이 이희저의 부친 묏자리를 봐주면서, “당대(當代) 발복(發福)하겠지만 수성 가진 자를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이희저 앞에 ‘물 수’(水=?)변을 가진 홍(洪)씨가 나타나자 이희저는 귀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곽산의 김창시(金昌始)도 비슷한 방법으로 포섭했다. 이 밖에도 홍총각(洪總角)·이제초(李濟初)·김사용(金士用) 등의 장사를 포섭했다. 소설은 홍경래가 순조 11년 모친과 형을 모시고 가산의 다복동으로 들어갔다고 전하는데, 바로 혁명의 전초기지였다. 소설은 이때를 이렇게 표현한다.

“다복동은 가산과 박천 사이에 낀 버드나무 잎과 같은 형국의 땅으로, 좌우가 유달리 험준하지는 않지만 울창한 산비탈로 은폐된 아늑한 골짝이었다. 뒤쪽으로는 경의(京義) 간의 대로와 통하고, 앞에는 대령강(大寧江)이 흐르고 있었다. 골짝의 안은 그다지 넓지 않지만 약 20리 길이였고, 안과 바깥 골짝은 수륙 통행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적당히 깊고 옅어 숨거나 나타나는 데 모두 편했다.”

홍경래는 금광을 한다는 명분으로 장정들을 끌어모아 군사훈련을 시킨다. 장정들에게 땅을 파게 해서 기운을 평가하고, 돌덩이를 들어 힘을 측정하며 높이 뛰게 해 날램을 평가했다. 사격·기마·검술을 가르쳐 병졸의 등급을 정하고, 후한 상급을 베풀어 환심을 샀다.

홍경래는 순조 12년(1812) 임신(壬申)년을 거병의 해로 잡았다. 홍경래는 김창시를 시켜서 “일사횡관(一士橫冠)에 귀신(鬼神)이 탈의(脫衣)하고 십필(十疋)에 가일척(加一尺)하고 소구유양족(小丘有兩足)이라”는 참요(讖謠)를 널리 퍼뜨리게 했다. 일사횡관은 임(壬)자의, 십필가일척은 신(申)자의 파자(破字)로서 임신년에 기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내용의 파자가 퍼지는 가운데 다복동에 1천여 명이 몰려들자 거사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래서 홍경래는 거사 계획을 앞당겨 순조 11년 12월 15일 평양의 대동관을 불태우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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