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127회/ 19장 들끓는 바다 (1)
[연재소설 청룡도] 127회/ 19장 들끓는 바다 (1)
  • 이 은호 작
  • 승인 2020.04.0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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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가을의 흉작은 겨우겨우 지탱해 오던 조선의 백성들의 삶의 명줄을 몰아죄고 있었다. 봄에 다섯 섬을 빌려 종자와 식량으로 쓰고는 가을이 되어 열다섯 섬의 환곡을 요구받는 것은 물론 가외로 군포와 토지세, 각종 관아세가 줄줄히 부과되니 백성들은 자신의 입속에 넣을 낱알 한톨이 남아있지 않고 다시 환곡을 해야하는 지경이었다.

환곡의 수세(收稅)는 거칠고 용서가 없었다. 세금을 못내면 가재도구를 들어내는 것은 물론 가장에게 곤장을 치는 것도 불사했다. 가장은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가족들에게 연좌되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새로 환곡을 얻을 수밖에 없었고 이자는 거듭거듭 불어났다. 이 과정이 몇번 되풀이하다 보면 기어이 한 가정이 결딴나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이 일은 조선후기 사회가 안고 있던 고질병이었다. 그것은 성군 정조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조 21년(12월 13일이다) 채제공이 올린 보고를 보자.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요즘 듣건대 호남의 유개인(流丐人)이 호서지방으로 흘러들어감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곳곳에 유둔(留屯)하고 있다 합니다. 호남의 도신과 수령에게 신칙하여 구휼하는 방도를 강구해서 소문을 듣고 도로 모이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금년 농사와 민간의 정세를 보건대 세금 독촉에 부대끼는가 하면 먹을 곳을 찾아 돌아다니는 형편이니, 반드시 유리(流離)하여 다른 곳으로 갈 근심이 있을 것인데, 일념으로 걱정되어 잊혀지지 않는 마음이 어찌 일찍이 조금이라도 느슨한 적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지금 경의 말을 들으니 더욱 몹시 불쌍하고 측은하다. 이미 그런 말을 들은 뒤에 어찌 차마 안고 이끌며 다른 곳으로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연전에 관서(關西)에서의 일처럼 혹 쇄환(刷還)하는 일이 있게 되면 도리어 그 본성을 따르는 도리가 아닐 것이다. 영남과 호남의 도신에게 엄히 신칙하여 위급함을 구제하고 진휼(賑恤)하는 방도에 특별히 힘써서 유리하는 자와 거주하는 자로 하여금 소문을 듣고 도로 모여서 마음 편히 고장에 살게 하는 실효가 있게 하도록 하라. 도백과 수령의 근만(勤慢)은 저대로 고찰(考察)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뜻을 아울러 분부하라.”하였다.

과도한 환곡과 세금의 부과는 농민들을 농토에 붙들어 두지를 못했다. 농토에 붙어 살면 가족의 생도지망은커녕 죽도록 노동만 바치고 엄혹한 굶주림과 세리들의 폭력을 보상(?)으로 받는 체계에서 그들이 이탈을 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일 터이다. 이 문제를 정조와 순조는 실록에 한마디씩 하고 있다. 농사짓는 사람은 한명이고 먹고 노는 사람은 열명이라는 것이다. 정조 때 인식하고 있던 이 고질병은 순조 때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농토에서 유리된 백성들은 상대적으로 부강지역인 도회지로 몰려들었고 환곡이나 각종 세금을 떼어먹고 도망을 친 백성들은 깊은 산중이나 계곡 등을 무대로 무리를 지어 활동을 전개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들은 명화적, 향도계, 거사패 등의 고상한 이름을 지어 무장을 하기에 이르러 사회 안에서 치외법권층을 이루게 된다. 이라크의 문제인 텔레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홍경래는 호서지방을 돌아본 후 한양으로 들어와 있었다. 한양에는 김재찬을 중심으로 한 동지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감?"

"앉으시게. 이 수상한 시국에 한양까지 어인 행보신가?"

김재찬이 자신의 집을 찾아온 홍경래를 반갑게 맞이하며 물었다. 그들은 김재찬이 평양감사시절 인연을 맺어 이심전심을 나누고 있는 사이였다. 홍경래의 난에 연류된 가장 고위급의 인물이 바로 김재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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