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분풀이 ‘용정 장암동 학살’
패전 분풀이 ‘용정 장암동 학살’
  • 윤영상
  • 승인 2020.04.07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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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봉오동전투’가 화제가 된바 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 지난 1920년대 초 만주(중국 동북지역) 독립군의 활약을 새로운 시각과 아픈 기억조차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동안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청산리 독립전쟁의 숨은 조역으로 차가운 주먹밥을 건네던 손이었지만 이름 없이 억울하고 원통하게 스러져간 간도참변(間島慘變) 또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일제의 만행에 ‘잊혀진 희생자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일제는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 만주 거주 조선 민중의 은밀한 저항과 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정규군 대부대를 만주에 직접 투입하여 독립군을 일거에 소탕할 계획을 짰다.
  1920년 10월 말 전후시기에 일본군이 소위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중국 연변 지역에 침입해 독립군 관계자 및 후원자들을 무차별로 색출해 탄압, 무고한 동포들까지 조준 사격으로 학살하였다.
그중 한 사건인 36명이 희생된 ‘용정 장암동 학살’사건 등 일본 군경이 민간에 저지른 만행을 일부나마 밝혀보고자 한다.
  그동안 청산리대첩의 실상이나 전과에 대해서는 상당한 연구가 진행돼 그 실상이 비교적 상세하게 규명돼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 군경은 중국 연변과 남만주 서간도 지방에 침입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온갖 학살만행과 폭행, 각종 탄압행위를 자행했다.
  이때 학살된 일부 사례를 공개하고 100년 전 희생된 ‘잊혀진 의인들’을 뒤늦게나마 기억해 보고자 한다.
더불어 ‘이는 실재하지 않은 터무니없는 조작’이라는 주장에도 경고하고자 한다.
◈ 간도참변(間島慘變)
  일본군은 전초작업으로 1920년 8월 소위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우고 만주의 관동군과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까지 합류시킨 대규모 정규군을 간도로 보내, 일본군의 만주 출병을 정당화할 사건을 음모하였다.
  같은 해 10월 ‘훈춘사건’을 조작해 소위 ‘간도 출병’을 단행하여 만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전멸시키려는 소위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재만 독립군은 청산리 승전 후 이미 일본군의 추격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속이나 중·소국경지대로 부대 이동을 단행함으로써 일본군의 작전은 처음부터 차질을 가져왔다.
  더욱이 봉오동‧청산리 지역에서 한국 독립군에 당한 패전 분풀이로 일본군은 무차별 한인 학살 작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에 큰 피해를 입고 결국 독립군 추적에 실패하고 난 뒤 보복심으로 1921년 5월까지 북간도 및 서간도 지방에서 대대적 학살만행이 저질러 3, 4개월 동안 수많은 동포가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항일 무장 독립군 토벌을 이유로 일본군이 만주 한인 망명촌을 습격해 고국을 떠나 마을 액놀이 하나 없이 죽어라 농사지어온 우리 백성을 위해한 명백한 학살사건이다. 어느 시점에선가는 반드시 대일 사죄, 보상과 배상요구가 언급돼야 한다. 
  화룡현(和龍縣) 장암동(獐巖洞)에서는 마을을 포위, 28명의 기독교인을 세워 놓고 소총 사격 연습의 과녁으로 만들었으며, ‘장암동 학살사건’ 기념비 측면에 새겨진 글귀에는 36명이 희생됐음을 밝히고 있다.
  연길현(延吉縣) 의란구(依蘭溝)에서는 30여 호의 전 주민을 몰살하고 울부짖는 4형제를 불타는 가옥 속으로 밀어 넣어 태워 죽이기도 하였다. 일본군의 만행을 피해 도망가다 참극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연길현 와룡동(延吉縣臥龍洞)에 거주하는 교사를 붙잡아 얼굴 가죽을 모두 벗기고 두 눈을 빼내어 누구인지 식별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3개월에서 4개월에 걸쳐 수많은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하였으며, 조선인들을 보는 대로 학살하였다. 학계는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조선인들은 당시 문헌 등을 통해 확인된 수만 해도 무려 3,469명으로 추정한다. 그 외 확인되지 않은 노령 연해주에 살던 조선인들에게도 똑같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체계적 규명은 여전히 미흡한 실정이다.
  1920년 12월 23일 중국 신문 ‘익세보(益世報)’에 우리 독립군들은 분노하여 ‘일본군이 우리 한인을 상대로 잔인무도한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고 밝히고 정식 선전포고 하였다. ‘우리를 말살하려는 결심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자아 방위를 위해 일본에 선전포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와신상담하며 위아래 없이 한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영원히 복수를 잊지 않을 것이다”
  1982년 한국 영화 ‘일송정 푸른 솔’에서도 당시 ‘광적으로’ 학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으나, 학살당하는 한인들을 작두로 목을 친다든지 마을을 불태웠다.
   “일본놈들이 우리독립군들 하고 싸워서 지게 되면 꼭 힘없고 죄 없는 우리 동포들에게 그 앙갚품을 해댔지” 청산리 전투 생존자 이우석 옹의 무거운 증언이다. “그 통에 처참하고 무자비한 학살이 곳곳에서 벌어져서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 타는 냄새가 천지를 뒤엎었어. 동포들의 통곡이 하늘에 가득했지”
  이러한 피해 사례는 일본군 스스로 상부에 보고한 내용 중에도 있다.
  1920년 가을 중국 연변 지역(북간도)에 출동한 일본군 보병 75연대 보고 사례를 보면 당시 41세와 34세였던 황하구(黃河龜)와 강철규(姜徹奎)는 불온서적을 배포하고 끝까지 독립운동을 강행하는 등 단념할 의지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칼로 난자당했으며 한민회 소장이었던 장홍극(蔣洪極·재봉업)도 러시아령 각지의 불령단과의 연락을 맡고 있었다는 이유로 참살 당했다. 제28여단이 이 지역에서 조선인 522명을 죽이고 조선인 가옥 534채를 불태웠다. 기록을 보면 당시 일본군의 만행으로 인한 재산 피해액이 66,850엔(원)으로 추정된다는 통계도 보인다. (강덕상,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편 ‘현대사자료 28(조선 4)’)
  이름이라도 기억하고자 인용한다.
  이런 한을 남기는 것이 저들이 말하는 동양평화란 말인가
  장암동을 비롯한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은 만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의 만행현장 조사에 의해 상세하게 폭로되었다. 용정에서 제창병원을 경영하던 영국인 선교사 마틴(Martin, S.H)과 캐나다 북장로회 선교사 푸트(Foote, D.D)의 수기에서 일본군의 잔학상을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다.
  고문·생매장·방화는 물론 어린아이를 칼로 찔러 죽이고 시체를 태워 버리는 등의 극히 잔인한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연길 부근 용정촌 두도구(頭道溝) 부근에서는 일본군전신대가 전선이 절단된 것을 발견하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어린 소년을 범인으로 지목해 현장에서 참수하고 말았다. 그 소년의 잘린 머리를 전선에 매달아놓고 많은 사람이 지켜보도록 했다.
  이밖에 여자의 경우 강간도 서슴지 않는 등 매우 잔인한 방법이 총동원됐다. 뿐만 아니라, 모든 민가를 소각하고 가축을 약탈함으로써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영화 ‘암살’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된다. 영화 설정 상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카와구치 마모루는 간도 참변 당시 학살을 주도한 일본군 17사단의 지휘관이었다. 적 기관총 사수 4명을 잡는데 4발의 총탄만 쏜 안옥윤의 회상 장면에서 간도참변 때 자신의 어머니가 일본군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언급하는데 그걸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비록 짧은 울림이지만 당시 일본의 만행은 차라리 총으로 쏴 죽인 행위가 나아 보일 정도로 잔혹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와 같은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하기 위해 현지에 갔던 동아일보 기자 장덕진(張德震)을 일본군이 암살한 사건도 일본군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다. 독립군 연합부대에 참패한 일제가 군사 보복을 강행하기 전 조선·동아일보에 대해 무기 정간시켰다는 학설도 최근 제기됐다.(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우리는 사진을 몇 장 찍고 다른 데로 갔는데 방화한 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소사(燒死)의 악취가 나고 지붕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길에서 부인 네 명을 만났는데 각각 어린아이를 업고 각자 새로 만든 무덤 옆에 앉아서 우는 소리가 참극(慘極)하였다. 무너진 집 10채를 돌아다니며 촬영할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며느리가 통곡을 하며 재와 먼지 속에서 시신의 타다 남은 부분과 부서진 뼈와 아직 타지 않은 물건을 줍고 있는 것을 보고 동네 사람들을 청해 기도드리고 잿더미 속에서 잘라진 팔과 발을 얻어 언덕에 안치하고 사진을 찍었다… 내가 알고 있는 36개 촌에서만 피살자가 모두 140명이었다.”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신흥무관학교 출신 김산은 안동희 목사 일가가 당한 참변에 대한 기록도 남기고 있다.
  “안동희와 부인과 딸은 두 아들이 산 채로 세 동강 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지켜보았다. 그런 후에 노목사는 억지로 맨손으로 자기 무덤을 파고 그 속에 누웠다. 그러자 왜놈 병사들이 산 채로 그를 매장하였다. 세 명의 죽음을 억지로 지켜본 후에 부인은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내 학생 시절의 첫사랑이었던 열네 살짜리 소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알아내지 못했다.”(김산, ‘아리랑’)
  독립신문의 ‘서북간도(西北間島) 동포(同胞)의 참상혈보(慘狀血報:1920년 12월 28일자)’ 등은 1920년 10월 초부터 11월 말까지 훈춘·왕청·화룡·연길·유하·흥경·관전·영안 등 8개 현의 한인만 피살 3693명, 체포 171명, 부녀 강간 71명에 가옥 손실 3288채, 학교 소실 41개교, 교회 소실 16 곳이라고 전하고 있다.일제의 ‘조선’ 식민지 통치 기간과 그 전후시기에 만주에서 일본 경찰이나 군이 한국인을 ‘광적으로’ 학살한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원한이 있으면 풀면 그만이지만, 하늘의 분노는 어찌 감당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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