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청산리대첩 승전 100주년 특별기획, 장군의 성장과 3·1 운동 이후 (하)
[기획] 청산리대첩 승전 100주년 특별기획, 장군의 성장과 3·1 운동 이후 (하)
  • 윤영상
  • 승인 2020.03.0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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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주 지역에서의 활동

1919년 2월 ‘무오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 이후 곧 독립이 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었지만 상해에 위치해 지리적으로 무장투쟁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

이 무렵 김좌진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후 대한독립의군부의 후신으로 조직된 길림군정사에 참모로 참여하고 있었다. 서일 등 대종교 지도부가 조직한 대한정의단은 11월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며, 교관요원의 충원하고자 김좌진을 초빙하여 대한군정서의 사령관을 맡겼다.

1920년 초 서대파 십리평에 사관양성소를 설치하고 김좌진이 교장이 되어 사관생도와 병사를 양성하였다. 교관은 나중소, 이장녕, 김규식 등이 맡았다.

대한군정서는 1920년 10월경에 간부 및 병사를 합해 약 1,600여 명에 이르렀다.

1차 대전 후 러시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은 남하하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만주지역에서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는 조선 항일 무력단체들을 효과적으로 토벌하고자 하였다. 섬멸을 결정하고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琿春)사건을 조작했다. 그중 일본군 19사단 전부와 제11, 13, 14, 용산의 20사단에서 차출한 25,000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북간도 전체를 넓게 포위하였다.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실시하였다. 이는 중국의 주권도 무시한 ‘간도침략’이었다.

그러나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1920년 6월 삼둔자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기고 김좌진,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함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대적으로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김좌진은 10월 21~26일 벌어진 백운평 전투, 천수평 전투, 어랑촌 전투, 천보산 전투 등 크고 작은 10여 차례 전투를 총칭하는 ‘청산리대첩’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독립군의 전열 재정비, 만주의 삼부(三府)

청산리전쟁 이후 김좌진은 만주 지역 독립군들이 연합한 ‘대한 독립군단’에 합류하여 노령(露領)으로 이동하였다. 전략상 소련 영내로 이동하기 위한 밀산(密山) 행군 중에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하여 약 3,500명 정도의 병력을 갖춘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밀산을 거쳐 소련領 이만에 앞서 간 부대들이 자유시 참변에 휘말려 변을 당한 것을 알고 장군은 그대로 회군하여 만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김좌진은 다시 만주에서 밑바닥 독립운동부터 시작하였고 발해사의 심장 영안현 산시참 지역에 방앗간, 정미소 등을 설치하여 동포들과 동고동락하며 한족총연합회 주석 등 만주 독립운동 단체들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는데 1925년 신민부, 1929년 한족총연합회 등이 이 시기에 김좌진을 중심으로 창설된 단체들이었다.

무장독립세력의 최종 목적은 일본군을 몰아내고 자력으로 광복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에서 만주의 무장항일단체들이 들불처럼 일어나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라는 삼부가 조직되었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머리가 비대한 조직이었다면 만주의 삼부(三府)는 머리와 몸통, 손발이 모두 있는 조직이었다. 3·1운동 직후인 1920년, 50만 명에 달했던 만주 지역 한인들이 만주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만든 토양이 되어 주었다(우시마루(牛丸潤亮) 등이 1927년 작성한 「최근 간도사정(最近間島事情)」참조).

신민부의 결의안을 보면 “군사는 의무제를 실시할 것. 둔전제(屯田制) 혹은 기타의 방법에 의해 군사교육을 실시할 것.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간부를 양성할 것. 군사서적을 편찬할 것” 등을 규정했다. 김좌진은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부교장에 취임하였다. 5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장교를 양성했는데 독립군 간부로 활동하게 했다. 교관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오상세·백종렬 등이었다.

안도현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이강훈(李康勳)은 「민족해방운동과 나(1994)」에서 “나는 아침 조회 때마다 마을 옆에 흐르는 송화강 상류 언덕 위에 학생들을 집결시켜 놓고 마주 보이는 백두산 영봉을 바라보면서 애국가를 제창하게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장군은 우선적으로 농촌자치조직을 결성을 주도하였다. 또한 친일파와 공산주의 세력을 숙청하는 일에도 힘썼다. 한족총연합회는 농민들의 생활훈련과 영농방법의 개선을 위하여 그들 속으로 들어가 순회강연, 연극공연 등을 시도해 농촌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재만 한인들의 생활 향상과 군사력 증강, 교육사업에 중점을 둔 결과였다.

만주의 3군부(참의부·정의부·신민부)

신민부(新民府)

신민부(新民府)는 1925년 3월 10일 북만주 닝안성(寧安城)에서 독립운동이 일본군의 탄압에 의해 위축되는 상황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였다. 북만주의 항일단체들이 본격적이고 효율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중동선(中東線)교육회장 윤우현(尹瑀鉉) 등 민선대표들과 국내 10개 단체 대표들도 참가하여 발족했다.

신민부의 중심 세력은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였고 관할 구역은 동서로는 장춘에서 구참까지, 남북으로는 백두산에서 흑룡강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역사를 관통하는 시각으로 보면 신민부의 주요활동지역인 북만주 영안일대는 초기 발해사와 중첩되어 있고,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군의 나선정벌(羅禪征伐)군의 進擊路와도 겹쳐진다.
신민부는 공화주의와 민족주의를 기본 사상으로 하며 행정기관으로 중앙집행위원회, 입법기관으로 참의원, 사법기관으로 검사원을 각각 설치해 삼권분립을 추구했다.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에는 김혁(金赫)이,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은 김좌진(金左鎭)과 조성환(曺成煥) 등이 선출됐다. 500여명의 무장 별동대와 보안대를 두었는데 이들은 군사부 위원장 겸 총사령 김좌진이 통솔하여 북만주지역 악질적인 친일파 제거하고 한국으로 사람을 파견해 식민지 통치의 중요한 시설을 폭파하고 조선총독 암살을 꾀하기도 했다.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성에게 군적을 작성하는 군구제(軍區制)와 평소에는 생업에 종사하다 유사시에 독립군에 편입되는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고, 공농제(公農制)를 도입했으며 식산조합 및 소비조합을 설치했다.

한인 자녀의 의무교육을 위해 소학교 50여개를 세웠으며 노동 야간 강습소도 설치했다. 1925년 4월부터 기관지 「신민보(新民報)」를 발행했으며, 1926년 친일단체인 조선인민회 해림 지역 회장인 배두산을 처단했다. 1927년 8월에는 이중삼(李重三) 등 특수공작대를 한국으로 보내 일본 군경의 주둔 상황을 살피고 관련 정밀지도를 완성해 냈다.

삼부로 뭉쳤다, 그러나 청사진이 달랐다

모든 운동 세력을 하나로 결집해 민족유일당을 건설하자는 운동과 만주의 삼부를 통합하자는 삼부통합운동의 움직임 속에서 1928년 4월 김좌진의 신민부 본부를 찾아온 정의부 중앙집행위원 김동삼(金東三)과 김원식(金元植)은 신민부 지도자들과 “광복의 시급함은 혈전(血戰)인 바 혈전의 숭고한 사명 앞에 각 단(團)의 의견과 고집을 버려야 할 것”에 동의를 구하고 ‘삼단체 군부(軍部)의 조속한 합작’에 김좌진이 나서줄 것을 부탁했다.
마침내 1928년 5월 12일부터 길림성 화전현에서 18개 在 만주단체 대표자 39명이 민족유일당 건설 회의를 개최하고 협의회와 촉성회를 결성해 각각 통합에 나섰다.

협의회는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대표 세 명씩 모여 1928년 9월 길림 신안둔(新安屯)에서 삼부통합회의를 개최했는데 이때도 역시 통합 방식에 이견이 있어 어려움이 있었다.

독립운동에는 뜻을 같이했지만 주도권에 대한 밑그림의 차이가 노출 되었다. 결국 파국으로 치달아 민정파는 1929년 3월 해체돼 국민부에 참여하고, 군정파는 한족총연합회와 길을 합쳐 신민부는 와해되고 말았다.

살펴보았듯이 ‘독립군 전설 김좌진’은 북만주에서 족적은 뚜렷하다. 김좌진에 관한 영웅주의적 삶을 확인하고 싶었던 발걸음에는 김좌진과 함께한 숱한 동지와 부하들의 흔적이 더 두껍게 묻어 있음을 적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공산주의 세력이 한족총연합회의 세력 확장에 위기감을 느끼고 박상실을 사주하여 김좌진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1930년, 장군은 42세의 나이로 피살되고 말았다. 조직 부장을 맡은 김종진(金宗鎭)도 다음 해 7월 공산주의자 박내춘 등에 의해 살해되었다(박환, 「한족총연합회의 결성과 활동」, 『한국사연구』52, 1986).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김좌진 장군의 마지막 유언)

그의 장례식은 3월 25일 침통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부인 오숙근은 1934년 4월 유골을 창호지에 쌓아 홍주의병 총수였던 김복한의 사당이 있는 추양산 뒷산에 비밀리에 매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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