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61회 9장 역간계 (逆間計) (5)
[연재소설 청룡도] 61회 9장 역간계 (逆間計) (5)
  • 이 은호 작
  • 승인 2019.12.0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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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불교는 처참한 순간에 다달아 있었다. 전국의 사찰은 승려는 물론 지키는 사람 하나 없는 공찰이기 십상이어서 화적떼나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의 은거처로 전락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의  불교는 영남, 호남 평안도에 삼사(三詞)가 설치되어 있었다. 삼사는 총섭(總攝)이라는 관리승을 조정에서 임명하여 불교를 관리하는 제도였다. 총섭은 승려들의 징발 노역과 세수 부과는 물론 승려들의 조정에 대한 불온한 동향을 파악하여 보고하는 것이 일이었다.

국초부터 단물만 빨고 찌꺼기만을 뱉어 놓는 것이 조선의 불교 정책이었지만 후기로 오면서 바야흐로 조선의 불교는 경각에 달해 있었다.
기원전 1세기 허황후가 배를 타고 김해 바닷가에 상륙한 남방불교나 4세기 순도에 의해 고구려로 들어온 북방불교의 법등이 꺼질 대 위기였다. 그러나 이 환난의 순간에도 법등은 마지막 심지를 유지하고 있었다.

백파(白波)나 '초의 의순' 등이 선(禪) 묘목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불교가 선종의 면모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것은 온전히 이들 몇몇 학승의 덕분이랄 수 있다.
선(禪)은 역사적으로 보면 보리달마를 산파로 인도사상에 유교와 도교의 사료를 가미한 중국인들의 천재성이 만들어낸 종교다. 이 중국 선을 일본 학자인 스스끼다이세쯔가 선불교(humphreys)라 이름지으면서 오늘날의 선불교의 개념이 생겨난 말이다.

선(禪)자는 갑골문 금문 등에 보이지 않는 글자다. 중국의 고대 문자사전인 '설문해자'에는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선)禪이다 하고 있다. 시(示)가 의미고 단(單)이 발음이라 한다. 중국의 고대 문자에 보이는 선의 고대 개념이다.

산스크리스트어 dhyana 선나(禪那)는 집중적이고 일정한 방법에 의한 명상을 말한다. 중국선의 본체에 대한 돈오(頓悟)와 자성(自性)에 대한 직관(直觀)적 지각과는 무엇인가 조금 구별되는 것 같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다.

중국의 선은 달마를 비조로 한 육조(六祖)의 성과물이다. 응주벽관(凝注壁觀)의 달마나, 돈오견성의 '혜능', 평상심이 도라는 '마조' 등 조사선들의 결과물인 것이다.
온종일 침묵을 지키며 면벽하는 달마의 벽관은 선나(禪那)다.
달마는 양무제와의 대면에서 무주상보리(無住相布施)의 태도를 보여준다. 달마는 진리의 평등성과 무차별성을 말한다. 무아(無我)의 근본불교를 중도의 실상을 통해 보여준다.
달마의 선은 성(性)과 심(心) 그리고 인성(人性)으로 변화를 보이며 혜능의 돈오견성에 와서 완성의 모습을 한다.

혜능은 존재의 본질을 절대 공(空)으로 파악한다.
혜능은 가르침은 초역사적 현재에 충실함을 목적으로 하는 선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혜능의 법제자 마조도일은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파악한다.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라는 것이다. 마조는 마음, 곧 이것은 순수배양으로 만들어진 진심도, 이념적으로 초월한 이데아(idea)도 아니라고 말한다. 고상하고 거룩한 무엇이 아니라 일상의 주변에 언제나 살아 있는 그것이란 것이다.
마음 밖에 따로 부처 없다는 육조 혜능의 평상심이 곧 도라는 중국 선은 '조사선' '묵조선' 등으로 방기하며 발전한다.

조선 불교는 교종과 선종 양종으로 발전을 하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교종은 이미 맥이 끊겨 버렸다 할 수 있다. 장중한 행사와 각종 의례를 필요로 하는 교종은 경제적 사정상 선불교보다 먼저 녹아버렸고 정신적 수양으로 버티는 선불교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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