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조선을 알고 싶다-청룡도를 쓰는 이유
[연재소설 청룡도]조선을 알고 싶다-청룡도를 쓰는 이유
  • 이 은호 작
  • 승인 2019.12.0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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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도를 써 나가면서 도서관 출입이 잦아졌다. 고서는 구하기도 힘들고 완역본은 거의 없는 형편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골의 대학(?)은 가보나 마나다. 요즘 조선에 대한 책들이 무척 많이 출간되었다. 그것들 중에 나는 조선을 곡해하는 책들이 여러 권 나와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누가 언제부터 조선에 대해 이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걸까.

저자들을 살펴본다. 하나 같이 개량 한복에 수염을 기른 도사연한 자들이다. 이력도 가지가지다. 계룡산 도사부터 기상청 직원 출신, 거기다 민족 종교라는 여러 종파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눈여겨볼 정도의 내용일 턱이 없다.

멋진 우리의 역사가 있었다. 휘황찬란했다. 그때는 우리가 짱이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다 버려놨다. 우리 역사의 오리지널은 이성계가 다 모아 불싸질러 남은 건 하나도 없다.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이란 말도 있다. 뭐 이런 식이다.

주장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니 다 인정해 줄 일이다. 그들도 나라 사랑하고 역사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니 고단한 역사 읽기를 하는 것일 터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읽고 강단이니 재야니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편가르기가 이런 곳에도 있다는 것도 말이다.

250년 전 추석이 막 지난 어느날이다. 영조 임금에게 나주에서 장계가 올라온다. 추석 전날 바다에서 불어온 비바람에 나주 영광 일대의 침수 가옥이 3천여 채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영조는 즉각 나주에 경차관을 보내어 실태 파악과 피해자 구제에 나서며 자신의 반찬 가짓수를 줄이는 감선을 명한다.

22첩 반상이 기본인 조선 국왕의 반찬이 반으로 줄으니 11가지, 요즘의 평범한 가정의 반찬 가짓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날 삼척에서 다시 장계가 올라온다. 태백을 넘어온 바람에 의해 2천여 채의 민가가 파괴되고 논이 침수되었다는 보고였다. 태풍이 나주로 상륙하여 삼척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영조는 삼척에도 경차관을 보내며 다시 감선을 명한다. 왕이 1식 6찬의 밥상을 받은 것이다. 실록은 이때의 영조가 거의 밤잠을 못 자는 기록을 전한다. 조선의 군왕은 그렇게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이 해에 영조는 운종가 상인들을 괴롭히는 자신의 사위를 군기시 앞에서 참수를 하며 민심을 달랜다.

무도한 군왕과 수탐에만 매달리는 관리들의 천국으로 그려대는 조선의 역사서(?)를 보며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던 심이지(1735~1796)의 금영일기를 보면 조선 관리의 결코 쉽지 않은 관원 생활이 그대로 전달된다.

금영일기는 심이지가 충청도 관찰사로 있던 기록 중 일부가 남아 전하는 책으로 한자 영인본만 주요 대학의 서고에 전한다. 심이지는 경상도 관찰사에서 곧바로 충청도 관찰사로 보직이 되어와 충청도 좌우도 순행에 나선다. 일종의 도지사 초도 순시인 셈이다.

 ㅡ 우도순행(1780~9.13부터 10.1일 19일간)
  공주ㅡ 이인 ㅡ 석성 ㅡ 은진 ㅡ 임천 ㅡ 한산 ㅡ 서천 ㅡ 비인 ㅡ 남포 ㅡ 보령 ㅡ 수영 ㅡ 결성 ㅡ
홍주 ㅡ 명계(서산) ㅡ 태안 ㅡ 행영 ㅡ 태안 ㅡ 서산 ㅡ 면천 ㅡ 덕산 ㅡ 예산 ㅡ 유구 ㅡ 공주.
 ㅡ 좌도순행(1780~ 8월 16일부터 8월 27일까지 12일간)
  공주 ㅡ 광정 ㅡ 온양 ㅡ 목천 ㅡ 신원 ㅡ 서원 ㅡ 청안 ㅡ 음성 ㅡ 충주 ㅡ 원서 ㅡ 제천 ㅡ 임현 ㅡ
영춘 ㅡ 도담 ㅡ 담양 ㅡ괴곡 ㅡ 청풍 ㅡ 황간 ㅡ 수뢰 ㅡ 괴산 ㅡ 화양동 ㅡ 정천 ㅡ 속리 ㅡ 보온 ㅡ 안읍(옥천)ㅡ 증약 ㅡ 문의 ㅡ 동창 ㅡ 공주.

심이지의 관내 초도 순시가 얼마나 빠르고 치밀했는지가 금영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는 불과 31일 사이에 44개 관할지의 목군현과 군영 수영 찰방 국창 등을 살펴보고 그곳 관리들의 보고를 받고 충주와 홍주에서는 군사들의 사열과 간단한 무과를 실시해 초급 장교들을 임명(신임 관찰사는 그리할 수 있었음) 한다.

물론 순행 도중에 지방에 내려와 있는 전직 관료들의 집을 찾아 담소를 나누며 신임 관찰사로의 각오도 피력하기도 한다. 실로 살인적인 공무라 아니할 수 없다. 1일 80리에서 120리를 움직인 것으로 나와 있다. 당시의 교통 체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심이지는 3개월 만에 한양으로 교대되어 온다. 경상도에서 올라오던 길에 받은 충청도 관찰사 보직인 데도 (사정상 잠시라는것을 심이지도 알고 있었다.) 관찰사의 업무록에 나와 있는 대로 자신의 임무를 다한 조선의 고급 관원의 일상이 경이롭다. 주색이나 탐하고 백성들의 등창이나 짜내는 조선의 관원들로는 믿어지지 않는 기록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너무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일제에 의해 악랄하게 상처를 받은 역사는 조선이다. 조선을 온전한 자리에 돌려놓지 않고는 나는 고구려도 고조선도 없다고 본다. 조선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역사다. 무자년 설 명절에 우리가 제사하는 5대조 할아버지와 먼 조상들도 태반이 조선인이다.

사이비 종교 비슷한 교리(?) 강화를 위하여 역사를 퍼다가 똥통 속에 넣는 사람들을 보며 서글프다. 조선을 공박하는 책들이 10여 종은 족히 되었다. 특히 일본인 작가인 시바뇨따로의 소설 속에 나오는 이성계의 악의적 폄하를 주워와 민족 정기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민주주의가 좋다(?)는 생각도 든다.

조선이 살아야 고조선도 산다. 조선이 없다면 고조선도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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