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47회 7장 백경한 사건(5)
[연재소설 청룡도] 47회 7장 백경한 사건(5)
  • 이 은호 작
  • 승인 2019.10.2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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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사법체계는 의외로 단단하다. 경국대전과 대명률의 법조항에 맞추어 전국적인 형사 심문과 결정 재심까지 고도의 사법 시스템을 갖춘 국가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조선의 형사체계는 오늘날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한가지 예로 한양의 어느 곳에서 변사체가 발견되었다고 하자. 독자들은 먼저 포청에서 형리들이 달려올 것으로 알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다. 한양 안의 변사 절도 위조 등의 사건은 한성부의 지휘를 받는 5부의 임무다. 변사가 발생하면 해당 부(部)의 관원이 오게 된다.

해당부의 관원인 부관(部官)이 초검관이 되고 한성부에서 나온 랑관(郞官)이 복검관이 되어 두 차례의 검시를 하게 된다. 복검이 끝나면 두 사람이 만나 토의를 하여 사건의 전말과 범인 색출 등의 결과를 서류로 만드는 데 이때 형조에서 나온 관원이 참가를 한다.

포청은 살인 강도사건 등을 처리하기도 하지만 포청의 중요 임무는 도성안의 순찰과, 국체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기찰, 그리고 대형 사건에 대한 대응이다. 구한말 포청이 순시청으로 변하면서 온전한 경찰기구로 바꾼 것은 논외로 하자.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보고서를 완결(完結)이라 한다. 완결은 국왕에게까지 보고된다. 그리고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 피의자 심문조서인 동추(同推)가 만들어지고 형조는 옥사에 대한 의견을 겸한 최종보고서를 만들어 국왕에게 다시 보고한다.
이것을 결안(結案)이라 한다. 국왕은 이 결안을 보고 처리 결심인 판하(判下)를 하게 되는데 판결문과 같은 판하를 보고 형조는 조율(照律), 즉 형의 집행을 한다.

조선의 형사사건은 위조사건이 압도적으로 많다. 위조사건이 전근대 사회의 특성인 절도 사건을 앞설 정도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조선의 위조사건은 어보(임금의 도장) 전교, 인신(관인) 등을 위조하여 교지, 홍패, 문무과 합격증서 등을 만들어 판매를 하는가 하면 토지문서 집문서 등을 위조하고 형조의 관인을 위조하여 징역을 살고 있는 죄수들을 방면해 가는 등 상상을 초월한다.

위조사건은 조선의 사회질서가 문서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임을 말해준다. 문서의 발급과 유통 그리고 확인, 사회 경제의 흐름이 유지되는 사회에서 문서의 위조사건은 자연발생적이었고 수사기관의 대처 방법도 발전하게 된다.

조선의 문서위조와 변사 사건의 대처 방법은 대단했다. 중국에서 들어온 무원록 등의 감식법의 영향도 있었지만 형사 사건을 전문적으로 다뤄온 세습직 형방아전이란 전문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필자는 바둑관계 옛 전적을 뒤지다 18세기말 영변관아에서 만들어진 형리문초(진술서) 기록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현감의 바지와 이불가지 하나 분실된 사건을 놓고 수사, 심문, 기소 단계를 거치는 완고한 사법체계를 확인하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음이 심문 조서의 하나다. 토씨 하나 빼 놓지 않고 국역을 했다.


모년 모월 모일. 기생 운진 (24세)을 문초하다.

너는 관아의 사환이자 행수기생(기생 중 책임자)으로 관아의 옷가지와 이불 등 의류 침구류 등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지난날에도 도사의 도포를 분실하고 곤장을 맞은 적이 있는 데도 이번에 백일장 행사를 온 문천군수의 겉옷과 바지를 잃어 버렸다.

범인은 너로 보이고 너가 아니라 해도 다른 혐의자를 알 것 같기에 문초하는 것이다.

(어리석고 용렬한 사람이 관아의 사환으로 있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더구나 관기(官妓)로 있으며 사또의 보살핌을 받아 행수기생이 된 몸이라 아침 저녁으로 관아의 물품들을 관리하고 살피는 것이 임무이나 지난번 신, 구 사또의 이퇴임식 날 있었던 사건은 나와는 관계 없는 일입니다.

전임 사또는 순박한 분이십니다. 그러한데도 저희 기생들을 보자 풍류객을 자처하며 수줍어 하는 기생들을 방으로 끌어들여 분탕질에 열중했으나 내가 볼 때에 어설프다 못해(?) 설익은 것이었습니다.

자칭 먹이를 본 맹수의 자세와 먹이가 도망칠까 은밀히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초리로 노려 보기도 했으나 여자와 살정을 댈 때면 정신을 못차리고 구름과 비가 충돌하듯 거친 비명과 신음이 창밖을 어집럽히기 일쑤였읍니다. 한마디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더군요. 이런 경황에서 사또가 바지나 도포 한 벌 잃어버리는 것이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때 나는 방기(房妓)가 아닌 탓에 다른 곳에서 잠을 잤는데 갑자기 도둑으로 몰리니 자고 일어나 그물에 걸린 꼴입니다. 참으로 술은 김가가 마셨는데 이가가 취한 격이고 들판의 중이 짠 게를 먹었는데 산에 사는 중이 물을 켜는 모양입니다.

안변(安邊)이 크다고 하나 원래 기생 수가 적고 반반한 인물도 적습니다. 문천군수(안변에서 문천으로 이임해간 듯)는 풍정이 지나치고 안목까지 높아 함흥 일대의 여러 고을의 기생들까지 수탐하여 불러 들이고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는 형식(?)으로 여인들을 탐하다가 나까지 영을 받아 수청을 든 일이 있습니다.

엽색을 즐기다 단명을 하거나 건강을 해치는 일이 허다한데도 전임 사또는 멈추지 않다가 끝내 내가 여자를 조달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건 내가 관장을 박대한 것은 아닙니다.

돌아보면 하찮은 옷가지를 잃어버렸다고 전임 관아에 고변을 넣어 일을 이렇게 만든 것도 그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난 7월 7석날에 있었던 문천군수 행차 후에 또 옷가지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내가 아랫사람으로 의심을 받은 것에 불과합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지고 바늘도둑 소도둑 된다는 속담 등이 있어 더욱 난처하기도 합니다. 부처 밑을 더듬으면 삼검불이 나오고 상추밭에서 대변을 보는 것은 재범(再犯)의 우려 때문인데 아니 땐 굴뚝에 어찌 연기가 나겠습니까.

혼자서 고민을하다가 그날 문천군수를 동행한 차례(次禮)가 미심쩍기에 한밤중에 비를 무릅쓰고 백리길을 달려가 기생들 방을 뒤지다가 바로 그 옷가지를 찾았습니다. 관아의 물건은 함부로 훔치기 힘듭니다. 겹겹이 보는 눈이 있고 지키는 아전들의 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통이 없이는 안되는 것이지요. 차례는 문천군수와 형부 처제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입니다. 차례를 잡아다 조사하면 나의 억울한 죄가 풀어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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