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43회 7장 배경한 사건(1)
[연재소설 청룡도] 43회 7장 배경한 사건(1)
  • 이 은호 작
  • 승인 2019.10.2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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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빼어 들고 방안으로 뛰어든 사람은 백경한(白景漢)이었다. 그는 정주 사람으로 유학이었으나 상업에 나서 약간의 치부를 하고 지역의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적선을 베풀어 덕망을 얻은 자였다.

“이놈, 김창시. 내가 니놈을 잡아 역도로 관아에 넘겨야겠다.”
백경한은 홍경래가 막아서기도 전에 이미 뒤따라 들어온 춘대에게 제압을 당하여 팔이 꺾여 무릎까지 꿇려 있었다. 들고 있던 칼도 빼앗긴 뒤였다.

“당신은 정주 백대인 아니시오?”
홍경래가 춘대를 밖으로 나가라 신호를 하고 백경한을 자유롭게 해주었다.

“김창시 이놈?”
“일단 앉으시요. 앉아 얘기합시다. 자.”
홍경래는 백경한을 진정시키고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이희저도 그와 안면이 있는 터라 자리는 어색하지 않았다.

“홍대인과 이대인에게는 미안합니다. 다 저 역도를 잡기 위한 것이었으니 양해를 해주십시요.”
백경한은 김창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김창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들은 친구 사이였다.
김창시는 백경한의 인물됨을 알기에 그를 포섭하기위해 애를 많이 써오던 중이었다. 홍경래도 특별히 백경한을 주목해 왔었다.

“내가 뭐라 했기에 이리 난리를 치나?”
김창시가 정신을 차리고 반격에 나섰다.

“뭐라? 이 간찰을 보내고도 그런 소리를 하나? 의가 있다면 시에 참가하라니?”
백경한이 품속에서 간찰 한 통을 꺼내 내놓았다. 김창시가 보낸 것이었다.

“그게 뭐 그리 난리인가?”
“언참이 온 세상을 어지럽히는 때에 이따위 글을 쓴단 말인가? 내가 그 정신을 고쳐주려는 게야.”
백경한은 의시(義時)를 말했다. 의시는 정조가 한 시대를 주도한 정책을 말한다. 정조는 모든 정파에 관계없이 의리를 긍정하는 모든 사대부는 시(時)에 동참하라며 당대의 당파인 노론 벽파를 분열시킨 바 있다.

“백대인, 의리가 있는 자 시에 참가하라는 말이 왜 그르다 하시오이까?”
홍경래가 곤혹을 치루는 김창시를 가로막고 백경한을 상대하고 나섰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홍대인도 이대인도 같은 당파인가 보구료?”
“말이 나왔으니 솔직히 말하리다. 그렇소이다. 의가 있는 자 시에 동참하란 말은 해서승룡 서북용출에 참가하란 말을 에둘러한 것이오이다."
홍경래가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본격적으로 설득전을 펼칠 셈이었다.

“오? 그러니까 내가 역도들의 소굴로 들어온 것이구료?”
“백대인? 사람을 모으고 있소이다. 의리를 아는 자, 덕이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외다. 바로 백대인 당신 같은 사람, 의와 협을 아는 사람 말이오.”
“닥치시오. 의를 아는 자 아름답다하지만 의도 대의가 맞아야 하는 법.”
“백대인 지금의 시대가 대의에 맞는 시대오이까? 양반 상놈으로 갈려 양반은 억누르고 상놈은 죽어나는 세상이 대의에 맞느냐 말이오이다?"
“홍대인 세상은 조금씩 변하고 있지 않소? 9년 전 정왕후 시절에 전국의 노비문서를 불태운 적도 있지 않습니까? 첫술에 어찌 배부르겠소이까”"
백경한이 말하는 노비문서 소각 사건은 순조 1년(1800)에 있었다. 순조는 정조의 노비혁파 정책을 계승하여 교지를 내린 바 있다. 순조는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고 있을 때니 정책을 주도한 사람은 정순왕후와 심환지였다.

이날 순조의 명으로 돈화문 밖에서 불에 태워진 노비문서는 엄청났다. 먼저 종묘서, 이, 호, 예, 형, 의금부, 도총부, 좌우포청, 내시부, 장예원, 사간원, 성균관, 종부시, 시강원, 익위사, 사포서, 중남서학, 그리고 8도에 속한 노비문서 29.093명의 문서가 소각되었고 곧이어 내수사, 육상궁, 선희궁, 수진궁, 명례궁, 어의궁, 돈의궁, 영빈관 등의 36.974명의 문서가 불태워지는 일대 사건이 있었다. 하룻동안 조선 정부에 속한 노비 68.000명의 문서를 소각한 것이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여걸 정순왕후의 담대하고도 직선적인 결단을 본다. 영조부터 정조에 이르는 80여 년 동안 노비혁파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두 임금이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해온  일을 이 여걸이 일거에 해결한 것이다.

그랬다. 정순왕후는 노비혁파를 하면서 노비를 국가의 재산으로 아는 관료들과 사노비 해방으로 불이 번질 여지가 있어 불평이 많은 양반층의 극심한 불만대신 노비들을 포함한 백성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기도 했다. 정순왕후는 이 호응을 등에 업고 3만여 명의 천주교도를 처형하는 극단적인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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