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39회 6장 피바다의 시간 (4)
[연재소설 청룡도] 39회 6장 피바다의 시간 (4)
  • 이 은호 작
  • 승인 2019.10.1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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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록이나 남사고 비결류의 혹세무민은 용화세계를 꿈꾸는 미륵파와 정도령 운운하는 감결파라는 양 축으로 의외로 역사가 깊다. 그 중 숙종 때 있었던 여환의 난은 신비주의 종교의 대표적 케이스다. 20세기 한국 사회를 뒤흔든 오대양 사건이나 종말론 사건의 원조라 할 수 있다.

필자는 20년 전 오대양 사건을 취재한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종교의 무서움이 조직폭력의 그것에 못지않다는 것을 알았다. 오산 근방에 있던 한 공장의 지붕 위에 죽어 있던 28구의 시체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중 21세 된 간호원 출신의 한 여자의 손안에 있던 '사랑한다면 모든 것이 될까?'라던 메모는 아직도 나의 정신을 혼동시킬 정도다. 그 죽음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의 여자들이었다.

오대양 사건은 집단 살인극이다. 종교를 빙자한 만행임에 틀림없다. 일제시대에 있었던 수백 명을 강간하고 갈취하고 살해한 백백교 사건과 비슷한 것이 바로 오대양 사건이다. 그런류의 사건이 숙종시대에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숙종실록의 기록이다.

여환이라는 자는 본래 통천(通川)의 중(僧)으로서 스스로 말하기를, ‘일찍이 김화(金化) 천불산(千佛山)에서 칠성(七星)이 강림(降臨)하여 3국(麴)을 주었는데, 국(麴)은 국(國)과 음(音)이 서로 같다.’ 하였고 또 수중 노인(水中老人)·미륵 삼존(彌勒三尊)이란 말을 하고 그가 숭불하여 전국(傳國)하는 것으로 3년간 공부했다는 등 말을 하며 드디어 영평(永平)의 지사(地師) 황회(黃繪)와 상한(常漢) 정원태(鄭元泰)와 더불어 석가(釋迦)의 운수가 다하고 미륵(彌勒)이 세상을 주관한다는 말을 주창(主唱)하여 체결(締結)하고 기보(畿輔)·해서(海西) 사이에 출몰(出沒)하였다.

여환은 또 천불산 선인(仙人)이라 일컫고 일찍이 ‘영(盈)·측(昃)’ 두 글자를 암석(巖石) 위에 새기고 말하기를, ‘이 세상은 장구(長久)할 수가 없으니, 지금부터 앞으로는 마땅히 계승(繼承)할 자가 있어야 할 것인데, 용(龍)이 곧 아들을 낳아서 나라를 주관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은율(殷栗) 양가(良家)의 딸 원향(元香)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상한 징험(徵驗)으로 능히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오게 하는 변화 불측(變化不測)함이 있다고 하면서, 양주(楊州) 정성(鄭姓)인 여자 무당 계화(戒化) 집에 와서 머물면서, 그 처(妻)를 용녀 부인(龍女夫人)이라 하고, 계화는 정 성인(鄭聖人)이라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내 괴이한 문서를 만들어 이르기를, ‘비록 성인이 있더라도 반드시 장검(長劍)·관대(冠帶)가 있어야 하니, 제자(弟子)가 되는 자는 마땅히 이런 물품을 준비하여 서로 전파하여 보여야 한다.’며 인심(人心)을 유혹(誘惑)시키니, 한 마을 사람이 많이 따랐다. 또 ‘7월에 큰 비가 퍼붓듯 내리면 산악(山岳)이 무너지고 국도(國都)도 탕진(蕩盡)될 것이니, 8월이나 10월에 군사를 일으켜 도성으로 들어가면 대궐 가운데 앉을 수 있다.’고 핑계한 말도 괴서(怪書) 속에 있었다.

여환은 일종의 휴거주의자다. 7월 17일 한양이 물에 잠겨 세상의 종말이 오니 백성들이 모두 모여 그날을 준비해야 된다는 말로 수백 명의 백성을 모아 실제로 도성 안에 들어가 휴거를 기다리던 이들은 체포되어 20여 명이 참수된다. 사건이 희한하기도 했지만 조정은 어쩔 수 없이 주모자급을 처벌 하지 않을 수 없는 곤혹(?)을 치른다.

여환이 스스로를 미륵이라 하고 무당 계화라는 여인이 용화부인이라 칭하며 7월 17일을 세상의 종말로 규정하고 수백 명의 백성을 모아 산속에서 기도하며 세상 바뀌기를 바라는 황당(?) 사건은 조선 조정을 긴장시키다 못해 어이없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류의 사건은 영정조로 이어지며 기승을 떨친다. 남원 공주 가평 해주 등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영조는 밑도 끝도 없는 도참에 현혹되어 억울하게 죽는 백성들을 보고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포청에서 잡아 조사를 해보면 엉뚱하고 아무런 준비도 힘도 없는 백성들이 수없이 다치는 일이 계속 된 탓이었다.

계룡산에는 수백 명이 모여 진인 정씨가 나타났다며 공주까지 행군을 하며 노래를 부르고 나오다가 출동한 기마대에 짓밟히는 사건까지 일어나자 영조가 도대체 남사고가 누구냐고 물은 것이다. 조선후기 모든 혹세무민을 판 사람들은 남사고를 전면에 내세웠다.

남사고와 비슷한 오해를 받는 사람이 토정 이지함이다. 이지함은 다소 엉뚱한 성격이기는 해도, 사실은 엄청난 유학자다. 이지함의 제자 중에 '서기'라는 사람은 호서지방에서 송시열을 능가하는 학문적 인정을 받는다.

이지함은 호서유학의 양대 계파의 수장이다. 율곡 이이와 견줄 정도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지함은 엉뚱하게도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토정비결이란 책과 연관되어 진면모가 이그러져 있다.
  남사고는 천문지리에 뛰어났던 사람임은 인정되나 비결이니 정감록이니 하는 황탄한 책과는 관계없는 사람이다. 그가 한겨울에 추위를 달랠 솜옷 한 벌 없고 친구 부모상에 문병할 여비가 없어 외로웠던 것은 맞다. 그러나 남사고는 그런 신고를 떨쳐 내고 굽이굽이 흐르는 8도의 용맥을 따라 물처럼 바람처럼 떠돌며 밤이면 천문을 보고 시장에서는 사람들의 손금을 보아 주며 호구를 이어가며 자유를 찾았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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