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38회 6장 피바다의 시간(3)
[연재소설 청룡도] 38회 6장 피바다의 시간(3)
  • 이 은호 작
  • 승인 2019.10.06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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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기록에 언참을 지칭한 최고 기록이 성덕대왕 신종의 몸체에 있는 명문일 것이다. 에밀레종이라 부르는 이 범종의 표면에 있는 글 지견도원(地堅桃園)이 상그리에 바로 이상향을 지칭한 말이다. 이상향은 언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땅속에 숨어 있는 무릉도원. 신라인은 도교사상의 발로인 이상향이 땅속에 숨어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 사상은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정점에 이르는 도참으로 대변되는 풍수관으로 변모하며 발전한다. 도선의 도교적 풍수관을 이어받은 사람이 남사고다. 이중환의 스승 정도 되는 사람이다.

이중환은  신분이 정확하지 않다. 그의 신분은 겨우 1718-1719년 1년간 김천도찰방을 지낸 것과 도찰방의 선생안에 전하는 증광시 급제자라는 희미한 근거에 의지한 추측이 있을 뿐이다. 물론 성호 이익이나 이가환 등 그의 집안 문도들의 글 속에 단편적으로 전하는 기록도 자료가 되기도 한다.

백양(1751)에 환갑을 맞아 책을 쓴다던 이중환의 개인 기록과 김천역 선생안의 기록을 따져보면 이중환의 출생년도가 나온다. 1691년이다. 그는 28세에 도찰방이 된다. 도찰방은 정6품의 외직으로 무록관(無祿官)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시대 외관직은 관찰사 수령 외에는 모두 무록관이었다. 월급이 없는 관리라는 뜻이다.

이중환은 이때 목호룡을 만나 교류를 한 모양이다. 목호룡은 경종 때에 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상하게 한 사람이다. 이중환은 목호룡에 연좌 되어 절도에 안치된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끝이었다. 학문을 한 선비가 학문으로 풀 수 없는 삶이란 비참한 것이다. 한이 많았을 것이다. 이중환은 이 한을 전국기행으로 털어내고 세상에 무엇인가 의미를 남기고자 했다.

택리지에 풍수와 남사고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은 의외가 아니다. 남사고는 세상이 말하는 10승지를 처음 말한 사람이다. 남사고(1509-1571)는 왕조실록에 딱 한번 등장하는 사람이다. 영조가 도당에서 신하들에게 도대체 남사고가 누구냐? 하고 한번 묻는 대목이다.

남사고는 선조 때 관상감의 잡급직 관원을 했던 사람이다. 어찌 보면 이중환과 비슷하다. 그런데도 그가 죽은 백 년이 넘어 영조가 그의 이름을 묻고 있다. 남사고는 앉아 천 리 서서 만 리를 보던 신안(神眼)이었다. 그는 불운했다. 그는 곤궁했고 병약했다.

한겨울에 추위를 달랠 솜옷 한 벌이 없었고 친구 부모상에 문병할 여비가 없어 외로웠다. 그러나 남사고는 그런 신고를 떨쳐내고 굽이굽이 흐르는 8도의 용맥을 따라 물처럼 바람처럼 떠돌며 밤이면 천문을 보고 시장에서는 손금을 보아 주며 자유를 찾았다.

남사고는 이 여정에서 땅속에 숨은 땅을 찾아냈다. 10승지는 이렇게 태어 났고 그의 말은 비결이나 정감록이니 하며 전설이 되어 영조임금의 귀에까지 들린다. 이중환은 이 남사고를 존경했다. 그러나 이중환은 남사고의 도참을 존경한 게 아니다. 남사고는 알려진 대로 뜬금없는 도참가는 아니다.

남사고는 신안을 얻어 전국 유랑에 나섰다. 처음에는 부모의 유골을 아홉 번이나 이장할 정도로 좋은 땅에 집착을 했다. 조금 좋은 명당이 발견되면 그곳에 부모의 유골을 이장하는 식이었다. 그 시간과 과정 속에서 남사고는 원숙해지고 능란해진다. 그리고 어느날 꿈에 그리던 비룡승천(飛龍昇天)의 땅을 발견하고 마지막으로 부모의 유골을 이장한다. 그때 한 도인이 나타나 노래를 한다.
   구천이장 남사고야
   비룡승천 자랑마라
   고사괘사(枯死掛巳) 아니냐.

남사고는 이 노래에 확연대오를 한다. 용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형국이나  마른 나무에 걸려 있는 뱀의 형국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 것이다. 풍수를 통해 개인의 발복이나 복락을 바라는 것이 헛된 미망임을 깨달은 남사고는 활인(活人)의 풍수를 펼쳐 든다. 이중환이 주목한 것이 바로 이점이다.

사고나 이중환은 풍수나 도참이 패찰이나 예언 등으로 위장을 하며 세상의 민폐가 되는 것을 경계한다. 남사고는 비결로 희망 없는 세상에 희망의 메시지를 담으려 했고 이중환은 택리지를 통하여 조선 후기 사회에 다가올 상업과 물상의 교류라는 시대적 조류를 준비하는 토지관을 펼친다.

이중환은 나라의 발전은 상업과 물상의 고른 침투에 있다고 했다. 경제의 원만한 흐름은 국토의 균형적 발전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10승지니 도원이니 하는 말들은 그들에게는 이미 중요한 말이 아니다. 실사구시가 중요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도 무릉도원을 그리는 이상적 세계를 꿈꾸던 조선 민중들은 많았고 그들은 감결파를 이루어 충청도 계룡산으로 몰려든다. 이때 이중환은 충청 좌도 여행에 나선다. 좌도는 지금의 충북 지역이다. 이중환은 속리산 10승지를 말하며 청풍강의 물맛이 세상에서 최고라 말한다. 중국의 유명한 약수인 수렴(水簾)의 맛과도 같다고 한다.
- 나라의 동남방에 자리하여 그 기운으로 벼슬한 사람이 8도에 으뜸이다.
1로가 8도로 통하는 곳이 청풍이다. 조령과 죽령 그리고 남한강의 물길이 한양으로 직접 통하는 탓에 영욕이 언제나 교차하는 곳이 그곳이다. 청화산은 백두대간의 통로인 충청과 경상도의 경계에 있다. 그 산을 넘어 우복동(牛腹洞)이 있다. 소의 뱃속과 같은 곳 10승지의 하나다.

이중환은 청화산을 좋아했다. 자신의 호를 청화산인이라 하기도 했다. 청화산은 소백산과 황악산의 징검다리다. 남사고는 소백을 일러 활인의 산이라 했고 이중환은 신의 산이라 했다. 활인과 신의 산이라는 뜻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국토의 관념과는 조금 다른 듯하나 진정성은 같다.

이중환은 청화산이 멀지 않은 김천에서 1년간 관원 생활을 했다.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1년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근방의 기흥창이 있던 지역을 무릉도원이라 생각했다. 기름진 땅과 넉넉한 인심 그리고 외상거래를 서슴지 않는 장사꾼들의 신용거래를 보고 미래에 다가올 이상세계를 예감했던 것이다.

이중환은 공리를 말하지만 공리에 빠지지 않는다. 풍수를 말하지만 풍수에 빠지지도 않는다. 그는 실재하는 이론을  중요시 했다. 그 정신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나라와 국토에 아낌없는 사랑을 바친 이유다.

이중환은 남사고비결과 정감록을 이렇게 양지에서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홍경래는 이 정감록을 이중환과 전혀 반대로 이해하고 민심 이반의 전략으로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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