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홍주 출신 전운상 장군의 육조홀기(육군 교범)로 본 홍경래의 난-1
[기획] 홍주 출신 전운상 장군의 육조홀기(육군 교범)로 본 홍경래의 난-1
  • 이 청 충청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승인 2019.10.01 17: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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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주의 인물중 전운상(1694-1760) 장군이 있다. 그의 후손가에서 나온 육조홀기는 조선군의 전술 교범으로 의미가 있다. 필자는 홍경래난의 전장에서 관군과 반군간의 전투에 육조홀기가 충실하게 반영됨을 알고 이글을 쓴다.

  홍경래의 난은 정조말기부터 시작되었다. 홍경래가 20대 중반부터 세상을 뒤엎을 꿈을 꾼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홍경래는 42세에 난을 일으킨다. 정조가 죽은 1800년은 홍경래의 나이 31세였다. 홍경래가 세상에 분노하던 20대 후반인 정조 15년에서 25년은 조선의 정치와 경제는 파탄 직전이었다.
  산업과 경제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보잘 것 없던 조선이고 보면 정조의 시대를 딱히 다른 군왕과 비교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다만 정조시대의 산업과 경제는 다른 군왕 때보다 결코 좋다고 할 수 없다. 조선의 산업과 경제는 언제나 곤궁했다.
  그렇다면 정조시대의 정치는 정상적이었던 것일까. 역사가들은 이 물음에 수긍하지 않는다. 그들의 연구는 입만 열면 노론, 소론, 남인, 벽파, 시파 운운하며 정조시대를 재단하기 바쁘다. 정조시대에도 엄혹한 정치적 갈등은 여전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조는 조선을 이끈 개혁군주라는 이미지가 생겨났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성군이란 것이다.

  필자는 많은 자료들과 학자들의 정조연구의 단편적 자료 속에서 정조의 독존과 혼자 잘난 맛에 사는 개성에 놀랐다. 세상에 오직 한 사람으로 군림하려한 정조의 선민의식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정조는 당시대 사림의 영수이자 송시열의 현손인 '송명흠'을 불러 몇마디 담소를 나누고는 별볼일 없는 인사라 말한다. 당대의 학자를 대놓고 절단내어 상대적으로 자신의 학문을 높이는 정조의 일갈(?)은 보는이를 멋쩍게 한다.
  정조는 늘 이런 식이다. 스스로 '당송백선'이란 시집을 편찬하고 그 책에 수록된 일부 함량미달의 시를 지적하는 규장각 각신들의 말에 자존심이 상해 열변을 토하며 난리를 치기도 한다. 자신의 문학적 심미안을 믿은것이다. 정조시대 정조의 반대파는 다수였고 정조의 지원파는 소수였다. 필자는 이런 현상이 지속된 것은 바로 정조의 성격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정조는 기본적으로 선량했고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눈물도 많고 사랑도 많은 한마디로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다. 정조는 이 강점 많은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도 준다. 정조에게 감동을 받은 사람이 정약용이다. 또 한 사람을 거론하라면 김조순일 것이다.
  정약용과 김조순은 비슷한 연배로 정조의 똑같은 사랑을 받았으나 삶은 극과 극이다. 정약용과 김조순의 저술 속에 정조는 꿈과 같은 사람으로 등장한다. 두 사람은 꿈속에서 죽은 정조를 보고 감동하고 눈물짓는 대목을 표현한 글을 여러 편 남긴다.
  정조는 수십 명의 인재를 선별(정조만의 시각에서)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그중 한 사람이 서용보다. 황해도 서북지방에 여러번 암행어사로 거론된 사람이기도 하다. 서용보는 순조말기 영의정을 두 차례나 역임한 성공한 관료다. 정양용과도 각신시절 친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정조의 부음을 받고 궁으로 들어오다 길에서 조득영을 만나 서로 껴안고 울었다는 기록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각신들과는 보편적으로 친했다.
  이 서용보의 행보를 보면 정조의 사람 보는 눈이 얼마나 한가(?)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서용보는 정조가 죽자 곧바로 정조의 생전사업을 거스르는 일에 앞장을 선다. 그건 정조가 키운 각신들 대분분의 행동이기도 하다. 오랜 유배지에서 돌아와 복귀를 노리던 정약용의 재등용을 끝까지 막아선 사람이 서용보다.

  이런 일연의 현상을 보면 정조가 생전에 펼쳤던 중요사업들이 얼마나 공분을 모으지 못햇던가를 알 수 있다. 장용영의 철폐, 화성건설 이후 활용가치의 논의중단, 규장각의 효용성의 재고 등에서 정조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던 수십 명의 각신들 중에서 목숨걸고 반대를 했던 인물이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기풍의 선봉군이 안주 근방에 도착한 것은 12월27일 한양을 출발한 지 3일 만이었다.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단일부대가 한양에서 개성 평양을 거쳐 안주로 3일 만에 이동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빠른 이동과 기동을 목표로 하는 현대의 공수군이나 해병대 등의 하루 이동목표가 백 리인 것을 보면 조선군의 작전 능력이 장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눈내리는 겨울 벌판을 바람처럼 달려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박기풍이 안주 근방에 도착한 시간 안주의 병영군을 소집한 평양병사 '이해우'는 청천강을 넘어 송림(松林)벌판에서 홍경래군을 막아서고 있었다. 전투는 홍경래군의 선봉장 홍총각부대와의 접전이었다. 진중일기는 이날 홍경래군의 적정을 탐지하여 순무영에 보고한 이해우의 첩보가 실려 있다.
 
 안주병영에서 10리 떨어진 박천 송림에는 밤에는 횃불, 아침에는 밥짓는 연기가 역력히 보이며 척후병과 탐지 기병이 종종 출몰하며 군수물자는 각 읍의 창고에서 실어오고 식량은 주변의 사창에서 강탈한 것으로 무장과 식량을 삼아 훈련을 하는 등 급박하게 공격해올 태세입니다. 곳곳의 모여 있는 적당은 기백명이고 어떤곳은 삼백명 정도로 보입니다. 송림에 모인 적당은 3백에서 6,7백 정도인 듯합니다. 관군은 각 읍에서 징발한 2000명인데 쓸만한 자는 9초(1100명)정도입니다.

  이해우는 홍경래군의 병력을 천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자신의 부대도 쓸만한 병사 9초라 말한다. 쌍방의 군세가 비슷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해우는 정조의 친위대인 장용영 출신의 무장으로 군무에 밝았다. 그는 반란이 일어난 즉시 안주 영변 주둔군을 끌어모아 과감하게 청천강을 건너 홍경래군의 남진을 차단하고있다. 더구나 이해우의 방어선 뒤로 조선 최강의 부대 순무영중군이 도착해 있었다. 전쟁은 이미 이것으로 결정(?)난 것이다.

  이해우는 용장이면서 덕장이었다. 곽산에서 단신으로 도망쳐온 군수 '이영식'을 장수로 삼아 1천여 명의 병졸을 이끌게 한 것을 보면 그의 출중함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부대를 반으로 잘라 지휘권을 넘긴 것이다. 이영식은 문인이나 병법에도 조예가 있었다. 더구나 그는 홍경래군에 친동생과 아들을 잃은 원한이 있었다. 이해우는 이영식의 개인적 원한을 전쟁에 이용하여 큰 공을 세우게 하기도 한다.
  송림은 청천강과 박천의 입구인 다복동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는 커다란 벌판이었다. 해송이 무성하여 송림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 벌판에 진을 친 관군과 홍경래군은 29일 정오를 기해 첫번째 전투를 벌인다. 전투는 소라소리를 신호로 시작되었다.

<< 다음주 수요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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