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칼럼] 대동정신의 발현 면천객사
[충청 역사칼럼] 대동정신의 발현 면천객사
  • 이 청 논설실장
  • 승인 2019.09.29 14: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남투데이/ 이청 논설실장] 지금 복원이 추진되는 면천객사는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중요한 역사의 메세지를 준다. 그것은 1664년 객사 상량문과  중수기를 통해서다. 면천객사 전대청 대들보위에 쓰여있었던 상량문은 이렇다.

강희 1년 임인 10월6일 새로 짓고 기록한다. 군수 강전 좌수 조심 별감 임수재 이시망등이 힘을 모아 건축했다. 글 박취영.
(康熙元年壬寅十月初六日郡守姜典監後座道趙芯別監林秀材李時望成造. 書寫 朴聚榮)
군수 강전은 실무형 인물로 보인다. 조선실록에 강전과 관련된 약소한 기록이 그렇다. 강전은 중종때 중수하여 사용하다 퇴락한 객사를 대대적으로 새로 짓고 온고을 사람들과 상량을 올리고 축하를 한다. 객사 중수기에는 건축 이유와 주변의 협조인들의 공덕을 쓰고 협조자들의 이름을 모두 기록하는데 그  인물들이 충격을 준다.  중수기에는 총 22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양반 4명 아전 8명 천민 8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건축에 돈을 댄 사람들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고을의 대표적 건물에 아전층과 천민층의 이름이 대규모로 기록되었을리가 만무하다. 면천객사는 조선은 양반들의 세상이었지만 중인과 심지어 천민층도 때에 따라 당당하게 자신들의 이름을 역사에 기록하는 방식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양반= 군수 강전 좌수 조심 별감 이수재 이시망
아전= 호방 박취영 이방 한인길 안전 유진건 박순영 박계성 한유용 유의양 한충길.
천민= 소노 방축 수비 애신 창노 충업 노비 승립 관비 택옥 주모 옥매 노비 무일 사령 지논부.
우리가 아전(衙前)이라 말하는 관아의 실무자들은 지방 행정 실무와 나름 학문에도 상당한 실력자들이었다. 조선의 아전은 문자(한문과 이두)의 해독능력과 문서작성 서사(문서 꾸미기) 산술(수학) 법전에 대한 이해와 활용도가 필수였다. 동시에 아전들은 국가(조정)의 운영체계와 통치원리를 체득해야 했고 유교(주자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필요했다. 

조선의 아전은 따로 시험을 보는 방식이 아닌 일종의 가업으로 부형(父兄)을 통해 배우는 한편 어린시절부터 관아의 통인으로 들어가 육방권속의 업무를 체험으로 익히는 방식이었다.  아전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했고 자식들 또한 그 직업을 소망했다. 아전직이 지방행정의 실권자로 실속이 있는 자리였던 때문이다.  아전의 업무는 세금의 분정과 수납, 신역의 충역과 충군(병무), 각종 벌금 단속과 치죄로 하나같이 백성들의 삶과 생활의 이해의 최전선에 선 위치탓에 나름대로 갑의 위치였다. 백성들에게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아전들의 업무는 첩보문, 이문, 완문, 사송판결문등을 작성하고 이안(吏案) 선생안(先生案)등 지방관아와 아전들의 세계를 이해 할 수 있는 자료를 생산했다. 조선의 아전들은 지방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지방의 양반층는 지향점이 다른 방향에서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면천 아전층은 유씨와 박씨 그리고 한씨등이 대를 이어 세습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성씨들은 1894년 면천군수로 면불일기를 남긴 박시순의 일기에도 공히 등장한다. 면천객사 중수기에 등장하는 객사건축에 기여를 한 인물에 심지어 늙은 주모까지 기록된다. 이들의 건축비 제공과 부역으로 82간(178평) 한옥 조종관이 모습을 들어냈던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