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사즉생 의춘군 남이흥(南以興)의 협객행
[기획] 사즉생 의춘군 남이흥(南以興)의 협객행
  • 이 청 충청역사연구소 소장
  • 승인 2019.09.24 15:5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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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 이순신, 북방에 남이흥 있다는 북신사의 주련 의미

1628년 명나라 사신단의 종사관으로 간 이민성(李民宬, 1570년~1629년)은 5월 18일 평안도 선산포에 도착, 5척의 함선에 나눠 타고 5월 19일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접견해 황해를 건너 중국 등중에 상륙해 북경으로 입성한다. 이민성은 모문룡을 만나는 자리에 남이흥(南以興)이 배석한 장면을 기록한다.

이민성의 사신단은 명나라에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이해를 구하려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남이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문룡(1576년~ 1629년)을 이해해야 한다. 인조반정으로 조선 16대 군왕인 인조는 숭명(崇明)이 극한점에 달해 있던 시대에 쇠퇴하는 명과 절명등청(折明騰淸)으로 세계의 질서를 바꾸려 한 청(淸)나라의 등쌀에 기를 펴지 못한 왕이었다.

중립적인 외교전을 펼치고 있던 광해군과는 달리 전통적인 존명(尊明)으로 명나라와 협조 관계를 유지하면서 청의 욕구를 뿌리치려 했던 인조는 이미 광해군 시절에 국내에 들어와 눌러앉은 모문룡(毛文龍)으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모문룡은 명의 요동지역 책임자로 있다가 청군의 압박에 밀려 조선으로 쫓겨와 있으면서도 조, 명, 청 3국의 첨예한 긴장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 사리사욕을 채우던 소인배로 조선과 명의 골칫거리였다. 모문룡은 광해군 실각에 흠(?)이 있는 인조의 편을 들어준다는 구실과 명을 배반하고 청에 붙으려는 조선을 견제한다는 명목의 양 패를 들고 조선과 명의 조정을 농락하며 자신만의 이익을 탐하고 있었다.

모문룡은 매년 10만 석의 양곡과 온갖 공물을 조선에 요구했고 조선은 허리가 휘면서도 부합했다. 청은 이 점이 못마땅해 계속 조선에 모문룡의 축출을 요구하며 일전불사의 상태에 들어갔다. 인조는 사세가 급박, 북병사 정충신(鄭忠臣, 1576년 (선조 9) ~ 1636년 (인조 14) )을 불러 모문룡과 군영(軍營)의 허와 실을 묻는다.

정충신은 공주 출신의 무장으로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인조의 총애를 받는 무장이다. 인조는 모문룡의 마음이 이중적이어서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모자라 모문룡이 군대를 조련까지 하고 있다니 바둑으로 치면 위험이 어느 정도나 되냐 묻는다. 이에 정충신이 대답을 한다.

군대를 조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병졸과 군수물자가 충족되어 있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자신이 볼 때 모문룡은) 혼자 두는 바둑이다(상대의 생각은 고려치 않고). 이는 병법을 아는 자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조는 그렇다면 우리와 일전을 벌인다면 어떠냐고 다시 묻는다. 정충신은 간단하게 대답한다. (모문룡의) 모양이 이와 같으니 조선군이 허를 찌른다면 (모는) 무사치 못할 것이다.
이 기록은 인조에 대한 지금까지의 인식과는 조금 다른 점을 말해준다. 명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서인의 당수(?)에 불과한 인조가 명의 최전선에 서 있는 군영에 선제공격을 가하면 어떠냐 묻고 있다. 이날의 일을 인조실록은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인조 “겨울철의 방어는 어떻게 할 계획인가?”

정춘신 “안주를 불가불 지켜야 합니다. 만약 안주를 지키지 못하면 삼현(三縣) 역시 지킬 수 없습니다. 다만 군사를 더 보태지 않으면 결단코 성을 지킬 수 없으니, 반드시 포수(砲手) 6000~7000명을 더 보태야만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인조 “다른 도의 군사를 징발하기란 몹시 어렵다. 적이 반드시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면 단지 본도의 군사와 신출신(新出身)들로 지키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서로의 일은, 비단 오랑캐뿐만이 아니라 모문룡도 반드시 우리나라에 해를 끼칠 것이니, 그 지역의 장령(將領)들은 미리 대비해야만 할 것이다. 혹시라도 모문룡이 변란을 유발할 경우 본도의 군사만으로 당해낼 수 있겠던가?”

정춘신 “모문룡의 군사는 우리나라 군사보다 훨씬 적으니 무슨 막기 어려운 걱정이 있겠습니까” (인조실록 6년 5월 18일)

정충신은 조선에 들어와 있던 모문룡의 부대가 오합지졸임을 알고 있었다. 요동에서 밀려난 농민들과 일부 명군의 패잔병에 불과한 무리들이 명을 등에 업고 설치는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 당시 조선 무장들의 판단이었다.
사실 모문룡은 병법이나 치민(治民) 등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모문룡은 명의 군벌 ‘위충현’에 붙어 일신의 영달을 꾀하던 허접한 인물이고 휘하의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며 그 수도 수천에 불과하다고 정충신은 파악하고 있다. 특히 모문룡의 막하(부하 장수)들은 거의 두 마음을 먹고 있다고 한다. 일단 유사시 이런 체계로 전투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정충신의 판단이다. 이민성이 명나라로 떠난 후 인조 앞에 정충신 남이흥 신경진 조선의 삼대장이 부복했다. 정만이 합석한 자리다. 인조는 서북이 불안하다 말한다.

인조 “서북을 어쩔건가?”

남이흥 “서북의 근심이 하루게 다르게 거세집니다. 신은 한번 죽음을 각오하겠나이다”

인조 모(문룡)를 어찌한단 말인가?

장만(1566년 ~ 1629년) “모군이 난동을 부리면 쳐부술 수 있습니다.

인조 “무슨말인가?”

남이흥(1576년~ 1627년) “격파야 가능하지만 담은 어쩔겁니까?”

이날 남이흥은 평안도병마사로 보임을 받고 서북으로 떠난다. 조선의 삼 대장과 전략가 장만 앞에서 남이흥이 한 발언은 이미 죽을 자리라 판단한 남이흥의 장부출불귀향(丈夫出不歸鄕)의 협객행(俠客行)이다.
북방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인조는 북방에 지략과 담력을 함께 갖춘 장수를 보내고 싶어 했다. 인조는 내각에 평안도 병사로 남이흥이 어떠냐 묻는다. 가장 먼저 인조의 측신인 김류, 이귀 (1557년~1633년)가 남이흥을 비토하고 더해 청류 김상헌이 나서 힘을 보텐다.

사람이 괴팍하고 거칠어 안된다. 김상헌은 차라리 포도장 이의건(1533 ~ 1621)이 좋겠다며 추천까지 한다.

김류, 이귀, 김상헌은 인조 시대 가장 유망한 권력자이자 명사다. 이들의 비토에 신흠이 남이흥을 옹호하고 나선다. 지금 무장 중 지략은 정충신이고 장졸들의 신망은 남이흥이니 남이흥에게 북쪽을 맡겨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인조는 이 말을 듣고 남이흥을 선택한다.
남이흥은 병영지인 구성(평안북도)에 도착한 즉시 군대 점고에 나선다. 북방 군영은 이괄의 난에 태반이 무너졌고 반란을 염려한 조정의 기찰과 훈련 금지령으로 조선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남이흥은 북방 방어 전략으로 청천강을 방어선으로 안주성 수성전략을 조정에 건의한다.

그러나 이 건의도 이귀가 방해하고 나선다. 구성 안변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최전선을 한양 구중궁궐 안에서 지도 당하는 셈이다. 전선 책임자보다 안방 훈수꾼의 훈수가 먹히는 지경이다. 더구나 남이흥은 모문룡과의 소통에서 여러 번 모함을 당한다. 남이흥이 올린 보고서에 모문룡이 인조를 욕한 대목을 들어 조선 장수가 그 말을 듣고 분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도 김상헌이 최일선에서 핏대를 세운다.

남이흥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드디어 1627년 1월 8일 6개 부대로 나눠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 진격한다. 청군의 사령관 ‘아민 (청나라 사령관)’으로 장수 중 지략이 가장 밝은 지장으로 통한다.

그의 수하로 아지개, 데륵, 오토, 지르갈량 등 여진 팔기의 맹장들이 이끄는 부대가 단번에 의주 선천 정주성을 함락시킨 후 청천강을 넘어 안주성을 포위한다. 구성에서 안주성으로 들어온 남이흥 부대는 3만 청군에 포위돼 4000명의 성민과 함께 분사한다. 아민은 적장이지만 용맹스럽고 충의가 넘친다며 남이흥 순국에 경의를 표한 후 포로로 잡은 수백 명의 조선인을 풀어준다.

남이흥은 출전 시 이미 자신이 죽을 것을 알았다. 장수가 전선에 나가 있는데도 끊임없이 모함하고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남이흥의 선택지는 하나였다. 남이흥이 분사한 후 인조가 이원익과 신흠(1566∼1628)과 대화를 하는 자리에 기사관(조선시대 춘추관의 정6품에서 정9품까지의 관직)으로 당진 출신 이식이 참석하다 이런 한탄을 실록에 남긴다.

“남이흥은 기찰로 훈련 한번 못했고 군문에는 건달들만 가득하니 한스럽다”

택당 이식(1584~1647)은 대대로 당진에 살던 문인으로 많은 문집을 남겼다.

남이흥이 분사한 이 전투에서 이순신의 조카 이완도 의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이순신의 아들 한 명도 이괄의 난에서 종군하다 전사했다.
남이흥의 아버지 남유도 이순신 장군의 전선에서 전사한 바 있다.
대를 이어 전장에서 목숨을 바쳤던 무인들의 숙명에 숙연해진다.
안주에는 남이흥을 기리는 사당 충민사가 있다. 한때 천여 개에 달하던 조선 서원들을 일제 정리할 때 남겨진 47개 서원에서 살아남은 곳이 안주 충민사다.

충민사의 주벽 정청에는 의춘군 남이흥이 동문에 박명룡, 이상안, 안희진, 장포가, 서문에, 김준, 전상위 등이 모셔져 있다. 모두 남이흥과 분사한 인물들이다. 안주성 백성들은 스스로 재물을 모아 북신사를 세워 남이흥을 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지금 북조선 당국은 북쪽에 남이흥, 남쪽에 이순신 하며 이 두 성웅을 기리고 있다. 남이흥은 거친 남자였다. 그의 패기는 뜨거웠고 열정은 끓어 넘쳤다. 그 뜨거운 열정이 인간적 문제를 제기한 대목도 있지만 그 뜨거운 열정이 남자는 죽음으로 말한다는 협객행을 가능케 한 동력일지도 모른다.

당진 충민사에서 남이흥 장군을 기리는 행사가 매년 열린다. 지금까지의 전쟁 종군 분사 인조의 답례라는 남이흥 장군의 이미지에서 진일보한 접근을 제안한다.  남이흥에 대한 깊은 연구가 더 나와야 한다. 죽을 자리를 찾아가지 않으면 안됐던 남이흥의 당시의 모습을 조명하고 조선 명 청나라는 공존할 수 없었던 역사의 장에서 단합하지 못하고 갈등 시기하며 내부 분열로 치달았던 당 시대를 오직 죽음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인간 남이흥의 번뇌를 찾아 이해하는 순간이 진정한 남이흥 장군의 진면모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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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2019-09-24 19:19:21
남씨 후손으로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