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컬럼] 조국 조국 그리고 논쟁
[충청 역사컬럼] 조국 조국 그리고 논쟁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9.15 1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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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투데이/이 청 논설위원] 인간은 말로 인하여 비로소 현존 한다. 말이 있기 전 시간은 모호했다. 서로 뒤엉켜 불분명한 형태로 와해되는 과거에서 미래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있을 뿐이다. 말을 기호로 표시한 문자가 나오고 부터 인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분 했지만 그것들도 우주라는 대지평선(大地平線)에서는 한 덩어리로 뭉쳐 떠가는 무엇일 뿐이다.
이는 의사에서 철학자가 된 ‘막스피가르트’의 언어로 나는 그의 학설에서 더디게 가는 시간에 공감을 한다. 더디게 가는 시간은 빨리 가는 시간보다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것일까? 그는 다시 말한다.

-사랑은 분리되어 흐르는 시간의 외부에 있다. 그래서 연인들은 시간의 흐름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연인들은 사랑 하면서 시간을 창조한다. 사랑의 영역이 분리 되지 않은 시간에는 연인들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 다 많은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더디게는 오래이고 싶은 그 무엇이다. 사랑의 시간은 짧고 징역의 시간은 길 것이다. 하여 시인중의 시인 ‘패르난두 페소아’는 인간에게 지금 이 순간의 주의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기에 자신은 시간을 한껏 잡아 늘이고 싶고 아무 조건 없는 나 자신이고 싶다 노래했는지 모른다.
시간과 죽음은 철학이 아니라도 누구나 두렵고 무거운 담론이다. 인간이 죽는 다는 것은 무엇인가. 정신분석학자 ‘폴프란츠’는 깊은 통찰과 연구에서 화엄경의 구절과 다름 없는 답을 내 놓는다.

-죽음은 마치 별이 사라진 사건지평(ereigni shoriront) 뒤의 검은 구멍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은 아직 그곳에 있다.

폴프란츠는 자신의 스승 융의 논거의 제안인 ‘무의식적인 인간은 본래의 자기(selebst)와 세속적인 시간을 사는 자기(selebst. self)가  시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무한한 것이기에 나(ege kh)는 나의 유한을 알고 동시에 무한함도 인식하는 자세를 끝없이 따르고 추구 한다.
나는 또 다른 나와 타자, 그리고 또 다른 타자와 습합하고 충돌한다. 예민한 성정은 스쳐가는 타인의 숨소리에도 반응한다. 마디와 결이 다른 나와 나, 타자와 타자의 세계는 갈등의 바다다. 그래서 플라톤은 아랑케를 거론하며 인간은 갈등하는 존재라 말했는지 모른다.
갈등에는 모욕 주고받기가 뒤 따른다. 이 모욕을 잘 감당하는 방법으로 개짖는 소리로 치부하라는 스콜라학파가 있는가 하면 동양의 유가는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은 안된다(士可殺不可辱)는 비장한 방안을 내놓기 한다. 이 비장한 유가의 방식을 노자는 콧방귀로 비꼰다. 총애도 모욕도 허깨비일 뿐이니 개념치 말라(寵辱若驚)한다. 이것이 삶에서 일어나 죽음으로 끝을 맺는 말의 현장이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욕은 참기 힘든 병이다. 글쓰기는 모욕을 부르는 초대장이다. 플라톤이 살아 와 광장에 글을 올려도 편벽(便辟)은 튀어 나오게 되어 있다. 편벽은 오래된 말이다. 논어 출전의 편벽이 오늘날까지 원의(意)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 나누어 가지는 생각의 차이가 실감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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