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독립운동사의 ‘빛과 그림자’
예산독립운동사의 ‘빛과 그림자’
  • 이지웅 기자
  • 승인 2019.09.08 1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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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농독서회 김용재(뒷쪽 왼쪽에서두번째) 박희남, 김종억 사진      2)기록에  방산이 분명하게 보인다.
1) 예농독서회 김용재(뒷쪽 왼쪽에서두번째) 박희남, 김종억 사진 2)기록에 방산이 분명하게 보인다. 사진제공/충남 역사문화스토리텔링 연구소

 [충남투데이 내포/이지웅 기자] 충남독립운동사에 수록된 1074명중 예산 출신은 34명으로 충남 15개 시·군 중 최하위권에 속한 예산군이 ‘예산독립운동연구용역’이 보고됐다. (본보 8월 6일 ‘치욕적 대접받는 예산 독립운동사’ 게재)  같은 기관에서 정리했던 충청독립운동사에서 간추려 정리한 보고서는 34명에서 9년의 시차를 통해 3·1운동 분야에서 4명이 기타 항일운동에서 6명이 더 훈·포상자로 추가된 것으로 정리된다.

 2019년 현재 예산 출신의 항일운동과 관련해 애국 애족 독립장과 대통령 표창을 받은 분은 총 44명(항일운동 33명, 3·1운동 11명)이다.  지금껏 특정할수 있는 사료는 3·1운동과 관련 예산에서 10명이 총격으로 사망하고 20명이 부상하는가 하면 수십 명이 체포 투옥된 것으로 조사된다.  그런데도 3·1운동과 관련하여 포장을 받은 사람이 11명에 불과하다.

 특히 충청독립운동사가 출간 될 때 7명이 11명으로 재조사된 것은 항일운동과 관련해 의혈지사 선양에 박차를 가해오던 그간의 사회 분위기에서 보면 아쉬운 결과다.  이 기사가 나간 후 본지에 편지 한 통과 투툼한 자서전 한 권이 왔다.

 예산 농림독서회와 관련해 김용재 선생을 거론한 기사를 보고 그의 손자인 김현석이 보내온 것이다.

 김용재 선생은 예산 농림독서회 사건으로 투옥됐던 분으로, 강봉주·김용재·한정희 등은 예산 공립농업학교 비밀결사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예산농업학교 학생이었던 한정희는 정종호, 강봉주, 김용재 등과 함께 독서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독서회를 기반으로 1932년 5월 사회주의 이념을 기초로 한 사회를 건설한다는 목적으로 ‘좌익협의회’를 조직했다.  박정순과 한정희는 1932년 6월 학교 측이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권농일이라는 이유로 등교를 시키자 ‘학생동원의 부당성과 한인 학생들의 차별정책 철회’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좌익협의회 학생들이 퇴학 처분을 받아 조직이 와해 되자 1932년 9월 강봉주, 정종호, 박희남과 함께 예산 공산주의 학생동맹을 조직해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이들은 조직의 명칭을 ‘토요회’로 변경하고 학생들을 규합하기 시작했으나 같은 해 11월 친일 연극 상연 반대 투쟁을 벌이던 중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됐다.

 이 당시 수십 명이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9명일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킨다.  이들 학생들이 좌익이란 시선으로 연구 대상에서 제외된 점등이 예산독립 운동사를 왜소화 시킨 점도 있지만, 이들이 전부 좌익인사였는지도 불분명하다. 김용재 선생이 제헌 의원을 역임한 것도 고려할 점이다.

 예산 농림독서회 사건에서 빛나는 활약을 한 분이 박정순이다.  박정순은 교사 신분으로 독서회 사건과 관련 일본 형사들이 들이닥치자 자신의 집에 있던 팔십 여 명의 독서회 회원명단과 관련 자료들을 소각하고 온갖 고문에도 학생들을 보호한 공이 있다.  이들을 막후에서 도와준 사람이 성진호인데, 예산에서 문예광이란 잡지를 출간하고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던 그는 이 사건을 신속하게 보도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성진호는 2009년 애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독서회사건으로 실업 상태인 김용재를 해미에서 신문 지국 운영을 유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진호는 1933년 흑기 연맹 사건으로 공주 형무소에서 수감 중에 사망했다.  독립운동사는 설렁설렁한 연구로 될 일이 아니다.  아직도 후손들이 살고 있고 친일 좌익 등 온갖 논쟁이 있지만, 사료 판독은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본다.

 아래 자료는 1919년 3월 자 일본헌병대 보고서다.  

 예산 동쪽 산에서 야간 시위를 나섰다는 윤칠영 선생 기록인데 이 기록을 예산 읍내 부근으로 이해하는 행태가 지속돼 아쉽다.

 이 기록은 예산리 동쪽 방산 산꼭대기(禮山里東方山上)라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을 유수의 연구자들이 예산 동쪽 금오산이니 무슨 산이니 하며 오류를 반복하는 것은 시정돼야 한다고 이청 한학자는 지적한다.

 이청 한학자는 “예산독립운동사는 모든 면에서 갈 길이 멀다”며 “예산독립운동사는 현장을 뛰는 연구자가 필요하다. 자료만을 탓하고 그나마 있는 자료도 정확히 판독하지 못하는 연구력으로는 될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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