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칼럼] 연암선생 면천 군수 생활 4년
[충청 역사칼럼] 연암선생 면천 군수 생활 4년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9.05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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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투데이/ 이 청 논설위원] 백탑파의 좌장 그의 문인들 이희경 감상기등 면천을 다녀 가다.

조선시대 최고의 문인으로 손꼽히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은 61세가 되던 1897년 6월 정조와 대면한다. 면천군수로 떠나는 박지원의 하직(下直) 인사자리였다. 조선의 외관직은 발령즉시 군왕을 만나 인사를 하고 근무지로 떠난다. 군왕은 이 자리에서 수령칠사(七事)를 묻는다. 지방수령이 현지에 내려가 해야할 일을 말해보란 것이다.
수령은 농업을 증진하고 호구를 늘리며 향교를 부흥시키고 균역과 쟁송을 잘 관리하겠다는 지방수령의 임무를 말하고 군왕앞을 물러난다. 이것이 ‘하직’인사다. 박지원을 대면한 정조는 수령칠사를 묻지않고 ‘이방익’에 대한 글을 쓰라는 임무를 준다. 이방익은 남해에서 표류하여 대만을 거쳐 중국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그의 긴 여정을 책으로 써내란 지시였다.

박지원은 10년 남짓 관원생활을 했다. 그중 ‘안위’현감과 ‘면천’군수 자리가 그나마 안정된 자리였다. 박지원은 면천군수 이전에 이미 당대의 문인이었다. 그의 출중한 문장은 이덕무, 박제가등 시대의 문장가들로부터 인정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박지원의 문장을 문제삼아 여러번 수모(?)를 주며 그를 시험한다. 박지원의 문체가 순정한 고문에 걸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정조는 박지원의 재주를 아낀면도 있어 몇번 기회를 준다.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내려와 ‘면양잡록’이란 책을 쓰게한것도도 그런 경우다. 면양잡록에 수록된 ‘칠사고(七事考)’는 불과 십여년전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책의 제목과 성격 그리고 간략한 내용이 소개되다 얼마전 번역이 되었다. 칠사고는 지방수령이 해야할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으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비슷한 성격의 책이다. 박지원은 면천군수 재임시 ‘과농소초’라는 책을 써 농업의 진작과 수확량증대를 꾀한바 있었다. 칠사고에는 이 대목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벽돌의 제조나 수레와 수차의 개발과 활용등으로 지역 산업을 진작 해야한다는 수령의 임무등은 일반적인 수령칠사의 내용을 능가하는 실용적인 것이다. 박지원은 준비된 관원이었다. 군왕앞에서 수령칠사를 읇조리는 관원이 아니라 수령칠사의 ‘교범’을 만들 수 있는 경륜과 능력이 있었던 셈이다. 박지원은 정조가 묻는 수령의 할일에 ‘칠사고’라는 책을 만들어 대답하고 있는것이다.
박지원은 부자들의 토지를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자(限民各田議)라는 개혁적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박지원은 농정과 천주교인의 단속등의 문제로 당시 관찰사였던 한용화(1732-1799)와 갈등을 한다. 박지원은 관찰사와 관찰사의 막하(幕下 .참모)들과도 뜨겁게 맞선다. 다소 급진적이던 농정처리와 천주교인들에 대한 관대한 처분등이 관찰사와 시비거리였고 박지원은 여러차례 사직원을 제출하기도 한다. 박지원은 공주판관 김기응(1744-1808)에게 사직의 변을 서찰로 남기기도 한다.

[이곳은 바닷가의 작은 고을로 외지고 일도 간단하여 꽃이 피거나 잎이 떨어질때까지 그다지 바쁘지 않습니다. 차차 몇권의 기이한 글을 엮어 책을 만들까 합니다. 그러나 곤란한 일이 생겨 다시 이 책상자를 끌고 돌아가야할 모양이니 이런다가 좀이 슬고 쥐가 똥을 싸놓아 작파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이 슬플뿐이지 다른것이야 뭐가 있겠는지요.]


박지원은 언제나 사직을 결심하면서 직무에 충실했다. 면천에서 책 몇권 집필하는 것이 낙이라고 하면서 여차하면 그 낙마저 포기(?)하겠다는 결심이 서찰에 보인다. 공직자의 공과 사는 이런 자세에서 나온다. 관찰사 한용화는 사직원을 거듭 반려하며 고까운 심정을 ‘수령고과’로 반영한다.

[다스림은 구차하지 않으나 교묘하게 칭병이 잦다.]

한용화는 노론의 핵심으로 박지원을 포섭하려다 실패한 후 악감정을 이런식으로 푼다. 박지원은 사직서를 내고 한양으로 무단 출향을 한다. 정조는 이말을 듣고 군관들을 파견 박지원을 길을 막아서기도 한다. 박지원은 문인이면서 무인으로 활동한 모습도 있다.

박지원은 면천군수이자 수군 절도사로 두 척의 면천 전투선에 백여명의 수군을 태우고 안흥 앞바다를 거쳐 오천 수영으로 전개하는 훈련을 한다. 훈련이 끝난 후 박지원은 '이방익의 일'이란 보고서를 작성하여 정조에게 올린다. 이방익은 제주도에서 표류하여 중국을 거쳐 수년만에 돌아온 어부로 그의 경험을 자료로 남기는 일이 박지원에게 떨어진 것이다. 박지원의 중요 임무는 당시 충청도를 발호하는 서학을 단속하는 것이었다.

박지원은 1795년 청양 금정역장으로 내려와 있던 정약용의 기지로 체포한 이존창(1752-1801)을 천안 감옥까지 방문하여 대면한 후 그를 설득한다. 그리고 사형이 내려진 이존창의 사면을 정조에게 청하여 일시 방면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이존창은 충청도의 사도라 불리는 거물로 교황청 성인이기도 하다.

박지원은 양제저수지를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향교앞에 버려진 저수지를 수리하여 물을 가두고 가운데에 작은 초가 정자를 짓고 나무다리를 향교쪽으로 내고는 늙은이가 정자를 짓자 반기는 비가 내린다는 중국 고사를 들어 '취옹희우우사정'이라 이름을 짓기도 한다. 박지원은 '한용화' 다음으로 내려온 관찰사 '이태영'에게 정자의 현판을 청하여 받기도 한다.

박지원은 면천에서 칠사고, 면양잡록등 여러권의 책을 쓴다. 당시 평균 1년을 채우기 힘들던 군수직을 37개월이나 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을 쓰는 박지원을 옹호한 정조의 후원이었다. 박지원은 면천 군수를 하며 지역의 숙원 사업 하나를 해결한다. 그것은 면천에 계속 부과돼온 전함건조의 혁파였다. 당시 면천은 내포의 유력군으로 손꼽혀 전함과 화포제작의 과업이 계속 되어 인조 숙종 영조 시대를 내려오며 면천군의 재정에 고충을 주고 있었다.

1798년 음력 8월 면천군수 박지원은 한양 계동집을 지키고 있는 아들 종채에게 편지를 쓴다. 편지 속에는 200년전 면천(沔川)의 풍경이 아스라하게 살아있다.

-편지를 받아 본 지가 꽤 오래되고 보니 답답한 마음 가눌 수가 없다. 하늘은 높고 해는 빛나는데 서리 기운이 점점 다가오니 온 집안에 별일 없느냐.

이곳은 생활이 전과 다름이 없다. 생각은 말미를 청해 성묘를 가려고 제수를 모두 마련해 놓았다. 조상님들과 가까운 친척들 그리고 종형 산소를 차례로 살펴보려 제물을 모두 마련했는데 갑자기 휴가가 취소되었구나.

가을걷이가 한창이고 임금님의 분부가 지엄하여 어쩔 수가 없구나. 결국 쪼그리고 앉아 내년 봄을 기약할 뿐이다.
(覽書爲日梢久 殊深戀鬱 天高日晶 霜氣漸爾 揮舍擧獲无恙否 此中眼食無減 潗擬謮由 直省廣秋 祭需皆措備 且擬易掃勤 峴季父從兩山 故祭物易皆措裏矣 忽地由牀見退 諉以秋務方張 朝飭亦至嚴云 未免준坐 憮然失圖 奈何 今則不可不以明春爲期而己耳.)

박지원은 1800년 6월 정조의 죽음과 함께 충청도 관원들을 대표하여 고유문을 짓고 8월 강원도 양양부사로 승진하며 면천을 떠난다. 그의 나이 64세였다. 박지원에게 있어 면천은 제2의 고향이라 할만하다. 박지원은 면천생활에서 많은 책을 썼고 '서얼철폐' '노비혁파'등을 조정에 건의문으로 내기도 한다. 박지원은 양양에서 수개월만에 체직되어 한양 집으로 돌아와 수년만에 죽음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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