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칼럼] 연암선생 면천 군수 생활 4년(상)
[충청 역사칼럼] 연암선생 면천 군수 생활 4년(상)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9.05 0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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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탑파의 좌장 그의 문인들 이희경 감상기등 면천을 다녀 가다.

[충남투데이 / 이청 논설위원] 조선시대 최고의 문인으로 손꼽히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은 61세가 되던 1897년 6월 정조와 대면한다. 면천군수로 떠나는 박지원의 하직(下直) 인사자리였다. 조선의 외관직은 발령즉시 군왕을 만나 인사를 하고 근무지로 떠난다. 군왕은 이 자리에서 수령칠사(七事)를 묻는다. 지방수령이 현지에 내려가 해야할 일을 말해보란 것이다.

수령은 농업을 증진하고 호구를 늘리며 향교를 부흥시키고 균역과 쟁송을 잘 관리하겠다는 지방수령의 임무를 말하고 군왕앞을 물러난다. 이것이 ‘하직’인사다. 박지원을 대면한 정조는 수령칠사를 묻지않고 ‘이방익’에 대한 글을 쓰라는 임무를 준다. 이방익은 남해에서 표류하여 대만을 거쳐 중국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으로 그의 긴 여정을 책으로 써내란 지시였다.

박지원은 10년 남짓 관원생활을 했다. 그중 ‘안위’현감과 ‘면천’군수 자리가 그나마 안정된 자리였다. 박지원은 면천군수 이전에 이미 당대의 문인이었다. 그의 출중한 문장은 이덕무, 박제가등 시대의 문장가들로부터 인정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박지원의 문장을 문제삼아 여러번 수모(?)를 주며 그를 시험한다. 박지원의 문체가 순정한 고문에 걸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정조는 박지원의 재주를 아낀면도 있어 몇번 기회를 준다.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내려와 ‘면양잡록’이란 책을 쓰게한것도도 그런 경우다. 면양잡록에 수록된 ‘칠사고(七事考)’는 불과 십여년전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책의 제목과 성격 그리고 간략한 내용이 소개되다 얼마전 번역이 되었다. 칠사고는 지방수령이 해야할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으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비슷한 성격의 책이다. 박지원은 면천군수 재임시 ‘과농소초’라는 책을 써 농업의 진작과 수확량증대를 꾀한바 있었다.

칠사고에는 이 대목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벽돌의 제조나 수레와 수차의 개발과 활용등으로 지역 산업을 진작 해야한다는 수령의 임무등은 일반적인 수령칠사의 내용을  능가하는 실용적인 것이다. 박지원은 준비된 관원이었다. 군왕앞에서 수령칠사를 읇조리는 관원이 아니라 수령칠사의 ‘교범’을 만들 수 있는 경륜과 능력이 있었던 셈이다. 박지원은 정조가 묻는 수령의 할일에 ‘칠사고’라는 책을 만들어 대답하고 있는것이다.

박지원은 부자들의 토지를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자(限民各田議)라는 개혁적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박지원은 농정과 천주교인의 단속등의 문제로 당시 관찰사였던 한용화(1732-1799)와 갈등을 한다.

박지원은 관찰사와 관찰사의 막하(幕下 .참모)들과도 뜨겁게 맞선다. 다소 급진적이던 농정처리와 천주교인들에 대한 관대한 처분등이 관찰사와 시비거리였고 박지원은 여러차례 사직원을 제출하기도 한다. 박지원은 공주판관 김기응(1744-1808)에게 사직의 변을 서찰로 남기기도 한다.

[이곳은 바닷가의 작은 고을로 외지고 일도 간단하여 꽃이 피거나 잎이 떨어질때까지 그다지 바쁘지 않습니다. 차차 몇권의 기이한 글을 엮어 책을 만들까 합니다. 그러나 곤란한 일이 생겨 다시 이 책상자를 끌고 돌아가야할 모양이니 이런다가 좀이 슬고 쥐가 똥을 싸놓아 작파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이 슬플뿐이지 다른것이야 뭐가 있겠는지요.]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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