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칼럼] 역사의 현장을 복원한다는 것
[충청 역사 칼럼] 역사의 현장을 복원한다는 것
  • 이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9.01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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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투데이 / 이청 논설위원] 필자는 얼마 전 일본에서 바둑과 관련된 김옥균역사자료를 찾다가 일제 강점기 당진 군수를 지낸 일본인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첩에서 1917년 면천읍성과 관청 사진을 발견하고 스캔을 받는데 성공 했다.

동헌과 내아로 짐작되는 관사와 성문 남문일대의 사진 5장으로 면천읍성 복원의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동안 면천읍성 복원 사업이 상당히 진척됐다. 남문의 모습은 수원성을 방불케할 정도로 거창하다.

그러나 본성 높이에 해당하는 옹성의 모습은 뜨악(?)했다. 과연 조선시대 면천읍성 남문의 모습이 저런 것일까.
면천성은 주위가 3천 2백 25척에, 높이가 11척이고, 여장(女墻)의 높이는 3척이며, 적대(敵臺)가 7개소이고, 문(門)이 3개소인데 그 중 2개는 옹성(擁城)이 없고, 여장이 56개이며, 성안에 우물이 3개소가 있고, 해자(海子)는 혹 파기도 하고 혹은 파지 않기도 했다.

문종실록 문종1년.면천읍성은 세종 때 지어져 문종 때 완비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성문은 세 곳 이었고 옹성은 남문 앞에만 설치 됐을 것이나 과연 2019년 재현된 저 모습이 맞는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
필자는 몇 번이나 읍성 작업을 펼치는 인사들에게 우려점을 말했으나 말뿐이기에  지켜만 볼 뿐이었지만 이건 아닌듯 싶다.
사진으로 본 1919년 남문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는 너무 다르다.

면천관아는 봉우헌 보민당 조종관 사령청 작청(질청) 형방청 향청 마사(馬舍) 군기고 옥사등 10동 이상의 건물이 확인된다. 필자가 확인한 사진은 남문과 현청 그리고 현청과 조종관 사이에 있던 마사(마굿간)다.

남문은 퇴락한 누각과 한쪽이 무너져 내린 성벽의 모습이 선명하다. 거의 사라져 버린 옹성의 모습은 주변에 흝어진 작은 성돌이 흔적을 말해줄 뿐이다. 동시에 남문 앞에 깃발을 세운 주막과 초가집 몇 동이 아스라하다.

관아의 정문인 풍락루의 모습도 조금은 다르다. 지금의 풍락루는 1945년에 먼 거리에서 찍힌 사진을 근거로 재현한 것으로 관아의 정문이라기 보다는 다락을 달아낸 정자에 가깝지만 사진속의 풍락루는 관청의 외삼문으로 출입문이 강조된 모습이다.

면천관아는 한곳에서 5백년을 유지한 군행정의 치소로 유적도 5백년 시간을 걸쳐 생성 보수 소멸 재건축의 과정을 거쳤다.
고종임금 초기 면천군수 였던 박제경이 개축한 군자정을 고종말 면천군수였던 박시순이 다시 보수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불과 수십년 사이를 두고 개축하고 보수하는 것을 보면 5백년의 시간은 무상하다.

지금 복원하고 있는 면천읍성은 조선5백년의 시간 중 어느 시대를 염두에 두고 재현하는 것일까. 지표조사와 기초적인 발굴 조사위에 막연하게 관아와 각종 시설을 짓는 것이라면 재고해야 한다.

물론 행정과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백억 국고를 사용하는 사업인 만큼 잘 될 것으로 본다.
과연 면천관아의 복원된 모습과 조선후기 사진에 찍힌 면천관아의 모습은 얼마나 비슷할까. 필자는 기대를 하면서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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