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제소설 청룡도] 24회 4장 풍운의 그림자 (3)
[연제소설 청룡도] 24회 4장 풍운의 그림자 (3)
  • 이 은호 작
  • 승인 2019.08.2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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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조선의 역대왕들 중 특별한 사람이다. 남달리 영민하고 소심했던 할아버지 영조의 슬하에서 아버지 사도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했고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극심한 당쟁의 한복판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았던 인물이다. 정조는 정치의 비정함과 당쟁의 속성을 몸으로 깨달은 사람이기도 했다. 정조의 24년의 통치는 한마디로 갈등의 시대였다.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는 노론의 군주였다. 추대 과정과 보위 과정에 노론의 절대적 지원을 받은 영조시대에 노론의 독주는 업보였다. 이 과정에서 사도세자가 죽는다. 노론은 사도의 죽음을 방치한 책임이 있다. 사도의 아들인 세손에게는 사도의 죽음에 대한 의문과 복수의 칼이 있기에 노론의 경계 대상이 된다. 그러나 영조의 노련한 통치와 조정으로 세손은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첫 일성이 “나는 사도의 자식이다,”라며 노론을 압박한다.

 

노론은 서인의 후신으로 인조반정 후 조정을 장악해온 절대 당파였다. 노론 앞에 사색(四色)이니 뭐니하는 여타 당파는 조족지혈이다. 정조는 이 거대 당파 노론을 분열시킨다. 분열의 단초는 임오의리(사도에 대한)였다. 벽파 안에 사도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부류와 사도의 죽음을 측은해 하는 부류가 있음을 안 정조는 사도를 측은해 하는 인물군을 지원하며 세력화 시킨다. 이들이 시(時)파다.

시파는 서유린, 서유방, 김조순 등이었고 상대파인 벽(壁)파는 김종수 심환지 이서구 등이었다. 정조는 시파를 키우는 한편 정치적으로 파문했던 남인의 잔존 세력을 등용, 벽파에 대한 세력의 균형을 맞추면서 친위군인 장용영을 구축하여 명실상부 당정군(黨政軍)을 장악한다. 정조의 독단적이고 한번 마음먹으면 후퇴가 없는 성격은 자신이 조선 산림의 영수라는 장면에서 비등점에 이른다.

정조는 학문을 좋아했고 나름으로 상당한 내공이 있었다. 정조의 이 내공은 조선의 모든 신하들을 발아래 놓고 보는 오만으로 치닫는다. 왕권 앞에서의 경쟁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학문 안에서의 경쟁은 그렇지 않다. 정조는 학문도 자신이 최고라 생각했다. 하여 자신이 성리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성인이라 칭하기에 이른다. 요-문왕-주공-공자-맹자-주자-이이- 송시열로 이어지는 동방산림의 적통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정조는 벽파의 대장격인 김종수를 불러 놓고 기어이 이런 말을 하게 만든다.

- 나의 임금이 스승이시고 오늘날의 산림의 영수 또한 주상이십니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를 건설하며 576칸의 건물과 장대한 성(城), 그리고 현릉의 조성으로 90만 냥의 재정을 지출한 바 있다. 재정은 금위영 어영청 정번군의 예산 10년치인 33만 냥을 전용하고도 모자라 경상, 전라, 충청 감영에서 각10만 냥을 부담케 하여 화성의 완성 후 10년 이상 심각한 국고부족을 초래케 했다. 정조는 이것도 모자라 어머니 환갑연에 18만 냥을 더 쓰며 한껏 기분을 낸다.

정조는 장용영 외 초계문신을 중심으로 각신(閣臣)이란 친위 신하들을 구성, 모든 관원들과 차별화를 시켜 선대로 이어오며 그나마 기능해 오던 조선의 관료 체계를 심각하게 교란시킨다. 각신은 모두 38명이었고 이들의 전횡은 각신이 아닌 모든 관원들의 눈에는 목불인견이었다.

정조의 독단적 정치에 제동을 건 사람이 심환지다. 심환지가 화성 축조의 부당성을 정면으로 거론했고 이 건의에 초계문신들까지 동조를 할 정도로 화성축조는 당대에 이미 사회적 딜레마였다.

그러나 정조의 오불관언은 계속된다. 국가운영의 과오를 지적당하는 이 중대한 시기에 정조는 또 다시 임오의리를 거론하며 임오의리의 역도들은 지금이라도 반성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다. 보다 못한 이서구가 제발 말장난 좀 그만하라 주청을 하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정조는 49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정조의 시대는 조선 5백년사에서 특별한 시대다. 국가의 산업과 경제 농업의 생산력 확대 그리고 문화적 역량이 한층 강화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이 정조의 전적인 업적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당대 중국은 물론 일본 유구 필리핀까지도 모두 공유하던 세상의 변화가 조선에도 미쳤던 영향이기도 한 것이다. 홍경래의 활동은 정조 시대와 연이 닿아 있다. 하여 감히(?) 조선의 문화트랜드인 정조에 대해서 왜? 라는 질문도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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