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22회 4장 풍운의 그림자 (1)
[연재소설 청룡도] 22회 4장 풍운의 그림자 (1)
  • 이 은호 작
  • 승인 2019.08.2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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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도를 계속 견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조 시대를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정조는 말할 필요 없이 조선 군왕들 중 군계일학이다. 그러나 정조는 찬탄 일색의 허명의 이미지 속에 갇혀 사실의 역사에서 상당한 거리가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홍경래의 난은 정조 사후 10년 후에 일어난 조선 5백년사에서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홍경래는 정조 재위 기간에 난을 일으킬 생각과 준비를 했다. 학자들을 포함한 모든 위대(?)한 필자들이 입을 모아 찬탄하는 정조의 마지막의 기록이다.

 

정조24년(1800) 6월 28일 하룻동안의 실록의 기록.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좌의정 심환지 등이 아뢰기를,

“밤사이에 성체는 조금 어떠하십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각(漏刻)이 멎은 뒤에 잠을 조금 잤다.” 하고 이시수가 아뢰기를,

“밤사이에 무엇을 드신 것이 있었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혀 먹은 것이 없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인삼차를 지금 대령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응답하지 않았다. 다시 아뢰기를,

“인삼차를 끓여 들여온 지 상당히 지났습니다.” 하니 상이 마셨다. 시수가 아뢰기를,

“일찌감치 진맥을 하는 것이 좋겠는데 지방의 의관 김기순(金淳)과 강최현(姜最顯)도 대령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세상에 병을 제대로 아는 의원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불러들여라.” 하여 기순과 최현이 들어왔다. 강명길(康命吉) 등이 진맥한 뒤에 아뢰기를,

“원기 부족하기는 어제와 마찬가지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탕약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원기를 보할 약을 쓰면서 아울러 비장(脾臟)을 따뜻하게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최현 등이 진맥한 뒤에 아뢰기를,

“맥 도수가 부활(浮滑)하고 풍기운이 있는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체적으로 어떠한가?” 하니 최현이 아뢰기를,

“대체적으로는 부족합니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신들은 물러가 의관들과 탕약을 의논해 정하겠습니다.”하였다.

가감내탁산(加減內托散) 한 첩을 달여 들여올 것을 명하였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가 탕약을 받들어 올리자 상이 이르기를,

“누가 지은 약인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강최현이 지은 것인데 여러 사람의 의논이 대체로 서로 비슷하였습니다.”하고 상이 이르기를,

“5돈쭝인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인삼 3돈을 넣었습니다.” 하였다.

정조는 스스로 약을 지어 오게 한 후 복용을 하고 김조순을 불러 승지로 임명한 후 다시 상태가 악화되어 자리에 눕는다. 그리고 급박한 일들이 벌어진다. 이 대목에서 필자의 목소리는 모두 제외하고 실록의 기록만을 살펴보자.

상이 영춘헌(迎春軒)에 거둥하여 좌부승지 김조순(金祖淳), 원임 직제학(直提學) 서정수(徐鼎修), 검교 직제학(檢校直提學) 서용보(徐龍輔) 이만수(李晩秀)를 불러 접견하였다. 이때 상의 병세가 이미 위독한 상황에 이르러 만수가 홍욱호(洪旭浩)와 강최현(姜最顯)을 불러 진맥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어 약원을 입시할 것을 명하여 약원의 세 제조 및 각신(閣臣) 정대용(鄭大容) 김면주(金勉柱) 심상규(沈象奎) 김근순(金近淳), 의관 강명길(康命吉) 등과 지방 의관 전 현감 홍욱호(洪旭浩) 첨정(僉正) 강최현(姜最顯) 등이 앞으로 나가 엎드렸다.

상이 무슨 분부가 있는 것 같아 자세히 들어보니 ‘수정전(壽靜殿)’ 세 자였는데 수정전은 왕대비(王大妃)가 거처하는 곳이다. 마침내 더이상 말을 하지 못하므로 신하들이 큰소리로 신들이 들어왔다고 아뢰었으나 상은 대답이 없었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지방 의원 이명운(李命運)이 지금 대령하고 있으니 홍욱호 등과 들어와서 진맥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나 상은 응답이 없었다. 이에 시수가 욱호 등을 불러 들여 앞에 나가 진맥하게 하였다. 진맥한 뒤에 명운이 말하기를,

“맥도(脈度)를 감히 잘 모르겠습니다.” 하고, 홍욱과 최현은 다 아무 말도 없었다. 시수의 뜻에 따라 탑교(榻敎)를 쓰기를,

“인삼 5돈쭝과 좁쌀 미음을 먹어야겠으니 계속 끓여 들여오라.” 하고 또 탑교를 쓰기를,

“청심원(淸心元) 두 알을 먹어야겠으니 들여오라.” 하고 또 탑교를 쓰기를,

“소합원(蘇合元) 다섯 알을 먹어야겠으니 생강을 끓인 물에 타서 들여오라.” 하였다.

도제조 이시수가 앞으로 나가 큰소리로 아뢰기를,

“성상의 병세가 이와 같으므로 의약청에 탑교를 방금 써 내보냈습니다.” 하였다. 좌부승지 김조순이 탑교를 받아쓰기를,

“의약청(議藥廳)은 관례에 따라 거행하라.” 하였다.

좌의정 심환지 등이 앞으로 나가 큰소리로 신들이 대령하였다고 아뢰었으나 상이 대답이 없자, 인삼차와 청심원, 소합원을 계속 올려드렸다. 왕대비전이 승전색(承傳色)을 통해 분부하기를,

“이번 주상의 병세는 선조(先朝) 병술년의 증세와 비슷하오. 그 당시 드셨던 탕약을 자세히 상고하여 써야 할 일이나 그때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복용하고 효과를 보았으니 의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올려드리게 하시오.”

하자 도제조 이시수가 명길로 하여금 성향정기산을 의논하여 정하게 하였다. 혜경궁(惠慶宮)이 승전색을 통해 분부하기를,

“동궁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 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려 하니 제신은 잠시 물러나 기다리도록 하시오.” 하므로 환지 등이 물러가 문 밖에서 기다렸다. 조금 뒤에 환지 등이 문 밖 가까이 다가가 큰소리로 신들이 이제 들어가겠다고 아뢰었다.

자궁(慈宮)이 대내로 들어가자 환지 등이 다시 들어왔다. 부제조 조윤대(曺允大)가 성향정기산을 받들고 들어오자 시수가 받들어 올리면서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두세 숟갈을 입안에 넣었는데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토해내기도 하였다. 다시 또 인삼차와 청심원을 계속 올려드렸으나 상은 마시지 못했다.

시수가 또 명길에게 진맥하게 하였는데 명길이 진맥을 한 뒤에 물러나 엎드려 말하기를,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하자 제신이 모두 어찌할 줄 모르며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묘사궁(廟社宮)과 산천에 기도를 거행하였다

궁성을 호위하였다. 왕대비가 승전색을 통해 분부하기를,

“주상의 병세는 풍기운 같은데 대신이나 각신이 병세에 적절한 약을 의논하지 못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기색만 있으니 무슨 일이오.” 하니 좌의정 심환지가 회답하기를,

“이제는 성상의 병세가 이미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 천지가 망극할 뿐 더이상 아뢸 말이 없습니다.” 하고, 왕대비가 또 분부하기를,

“선조(先朝) 병술년에 주상의 병환이 혼미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하루 밤낮을 넘기고 다시 회생하였으며 갑오년에 또 그와 같은 증세가 있었으나 결국 회복하였소. 지금은 주상의 병환이 위독한 지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 무슨 말이오.” 하니 환지가 또 회답하기를,

“지금 또 병세에 맞는 약을 계속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제조 김재찬(金載瓚)이 인삼차와 청심원을 받들고 들어왔으나 상은 역시 마시지 못하였다. 도제조 이시수가 왕대비에게 들어가 여쭙기를,

“인삼차에 청심원을 개어서 끓여 들여보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드실 길이 만무합니다. 천지가 망극할 따름입니다.” 하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왕대비가 분부하기를,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하므로 환지 등이 명을 받고 잠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다. 조금 뒤에 방안에서 곡하는 소리가 들리자 환지와 시수 등이 문 밖으로 바싹 다가가 큰소리로 번갈아 아뢰기를,

“신들이 이와 같은 망극한 변을 만나 지금 4백 년의 종묘사직의 안전이 극도로 위태롭게 되었는데 신들이 우러러 믿는 곳이라고는 우리 왕대비전하와 자궁저하(慈宮邸下)일 뿐입니다. 동궁저하께서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감싸고 보호하는 책임이 우리 자전전하와 자궁저하에게 달려 있을 뿐인데 어찌 그 점을 생각지 않고 이처럼 감정대로 행동하십니까. 게다가 국가의 예법도 지극히 엄중하니 즉시 대내로 돌아가소서.” 하였는데, 한참 뒤에 자전은 비로소 대내로 돌아갔다.

유교(遺敎)를 선포하고 대보(大寶)를 왕세자에게 넘겼다.

이날 유시(酉時)에 상이 창경궁(昌慶宮)의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三角山)이 울었다. 앞서 양주(楊州)와 장단(長湍)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큰상이 날 징조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종척 집사(宗戚執事)는 어상(御床) 곁으로 나가 속광(屬纊)하고 검열 홍석주(洪奭周)가 ‘상대점(上大漸)’ 세 글자를 쓰자 가주서 여동식(呂東植)이 그것을 받들고 외정(外廷)으로 나가 내보였다. 좌의정 심환지가 말하기를,

“이번 대례(大禮)는 마땅히 《상례보편(喪禮補編)》을 준수해야 한다.” 하자, 예방 승지(禮房承旨) 이서구(李書九)가 《상례》를 가져다가 상고한 뒤에 제신과 의논하기를,

“속광(屬纊) 밑에 ‘숨이 끊어진 뒤에 내외가 다 함께 곡한다.’는 대문이 있고 그 밑에 비로소 고복(皋復)하는 절차가 있으니 마땅히 고복을 하기 전에 먼저 거애(擧哀) 절차를 거행해야 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왕세자 및 자전과 자궁이 거애하고 신하들도 모두 거애한 뒤에 내시가 곤룡포를 받들고 동쪽 처마 밑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북쪽을 향해 고복을 세 차례 부르고 곡하여 애도를 표하였으며, 대신과 각신들은 줄을 나누어 기둥 밖에 늘어서 있고 서구(書九)가 복의(復衣)를 받들어 어상(御床) 곁에 놓았다. 왕대비가 분부하기를, “경비와 민폐는 성상께서 항상 아끼고 안타깝게 생각하셨던 일이다. 이번에 드는 물자는 다 대내에서 내리겠으니 대내에서 준비하기가 적당하지 않은 의대(衣襨)만 밖에서 마련하도록 하라.”하였다.

위의 글은 실록 국역본을 고스란히 옮긴 것이다. 실록의 완전 국역은 대단한 것이지만 사실은 많은 문제점이 있기도 하다. 국역의 오류가 빈발하기 때문이다. 졸속으로 국역을 했다는 것은 국역자 본인들도 토로한다. 복수의 단체 그리고 수백의 국역자들이 각개전투로 작업을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국역이 되어 겨우 천자문이나 읽고 쓰는 필자도 이용을 하니 고맙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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