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칼럼] 면천관아는 어떤 모습이었나
[충청 역사 칼럼] 면천관아는 어떤 모습이었나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10.25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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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은 조선 3백여개 부·목·군·현 중 종4품관이 직임하는 군(群)이었다. 현(縣)은 종5품관 또는 종6품관이 보임된다. 면천은 2백여명의 이속(吏束)이 각자의 직무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업무에 임했다.

우리가 아전(衙前)이라 말하는 관아의 실무자들은 지방 행정 실무와 나름 학문에도 상당한 실력자들이었다. 조선의 아전은 문자(한문과 이두)의 해독능력과 문서작성 서사(문서 꾸미기) 산술(수학) 법전에 대한 이해와 활용도가 필수였다.

동시에 아전들은 국가(조정)의 운영체계와 통치원리를 체득해야 했고 유교(주자학)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필요했다. 

조선의 아전은 따로 시험을 보는 방식이 아닌 일종의 가업으로 부형(父兄)을 통해 배우는 한편 어린시절부터 관아의 통인으로 들어가 육방권속의 업무를 체험으로 익히는 방식이었다. 아전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했고 자식들 또한 그 직업을 소망했다.
아전직이 지방행정의 실권자로 실속이 있는 자리였던 때문이다.

아전의 업무는 세금의 분정과 수납, 신역의 충역과 충군(병무), 각종 벌금 단속과 치죄로 하나같이 백성들의 삶과 생활의 이해의 최전선에 선 위치탓에 나름대로 갑의 위치였다. 백성들에게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아전들의 업무는 첩보문, 이문, 완문, 사송판결문등을 작성하고 이안(吏案) 선생안(先生案)등 지방관아와 아전들의 세계를 이해 할 수 있는 자료를 생산했다.

조선의 아전들은 지방의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지방의 양반층은 지향점이 다른 방향에서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 지방 관장 또는 사또라 불리던 군수 현감 등의 위세는 대단 했다.

일례로 면천의 한 촌에 살던 백성이 군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4개의 문을 넘어야 했다.
면천성의 남문을 지나 관아로가 나오면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外三門) 앞에 서게 된다. 외삼문은 건장한 문지기가 지키고 있었다.
삼문이란 말은 출입문이 세개라는 뜻으로 좌우문은 아전들과 백성들이 중문은 군수가 다니는 문이었다. 외삼문은 2층 누각으로 되어 있고 면천의 풍악루가 해당된다. 지금의 풍악루 1층은 빈 공간이 이니라  3개의 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에 대한 고려도 생각해야 할 듯 하다.

위풍당당한 외삼문을 지나면  원옥(圓獄)이 있고  다음에 내삼문(內三文)이 있다. 내삼문부터 관아의 행정관소(館所)다. 이 공간 안에 객사, ‘동헌’, 질청(作廳) 등이 자리한 것이다.

면천관아의 아전들은 서 씨, 구 씨 등이 세습을 한듯 하다. 박지원 군수시절 아전 구 씨들의 활약 등이 돋보인다.

조선시대 관아에는 춘향전에 나오는 체신머리 없는 이방류의 인간은 없다. 그런 인물들은 관아 시스템상 존재할 수도 없었다.
조선의 아전들은 뼈속부터 전문가였다.

열살무렵부터 관아의 통인으로 들어가 업무를 익혔고 50살 무렵에 육방의 책임자인 방(房)에 보임될 수 있었다.

지역행정 40년이면 그야말로 달인일 것이다. 면천읍성의 스토리텔링에는 읍성의 중심이었던 관아문화의 검토부터 필요하다.
공간을 만들었다면 그 공간을 채울 내용물 즉, 스토리가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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