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칼럼] 면천읍성 풍락루에 대하여
[충청 역사 칼럼] 면천읍성 풍락루에 대하여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10.2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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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천읍성 내에 2007년 복원된 풍락루(豊樂樓) 안내문에서는 1851년 면천군수 이관영(李觀永)이 건물을 짓고 군민들의 풍요를 빈다는 의미에서 풍락루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쓰여있다. 각종 인터넷 정보는 1851년 또는 1852년으로 되어 있다.

이관영은 1851년 10월 26일 승정원일기에 면천군수를 보임 받으며 등장한다. 이관영은 청안이씨로 음서로 출사하여 여러 곳에서 군수를 했으나, 이기설(理氣說)과 예론(禮論) 등에 강점이 많은 학자였다. 특히 문장에도 밝아 시(만사), 각종 묘지명 등 200여 편의 글을 남겨  전 4권의 소오재 문집을 남긴다.

이관영은 면천군수로 만 5년을 근무한다. 조선시대 그 어떤 군수보다 근무기간이 길다. 그것은 이관영 개인의 정치적 처신과 지역 군민들과의 소통이 좋았다는 반증이다. 면천군수를 거쳐 간 조선시대의 역대 군수들의 행적은 지극히 소략하다. 겨우 이름 정도를 알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박지원을 제외한 대부분이 그렇다.

이관영은 면천군수로 부임한 다음해 1852년 금영각사등록(충청감영기록)에 행적이 나타난다.
10월 말 전라도 함평을 떠난 세곡선이 안흥 앞바다를 지나다 파도에 쓸려 당진 초락도에 좌초한다. 세곡선에는 천여석의 세곡이 실려 있었다. 지역 책임자인 당진현감 장익(이관영과 같은 날 보직을 받았다)이 달려 왔고 급보를 받은 충청관찰사는 이관영을 수습 책임자로 임명하고 군졸과 백성을 동원 현장 수습을 맡긴다.

이관영은 장익과 함께 좌초한 세곡선에서 곡식 200여 석을 꺼내고 인근 바다를 탐색하여 20여 석을 더 건져내면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장익은 당진문화원 앞 비석군에 이름이 보인다. 나름 공적이 있는 사람이다.

이관영의 행적은 더 이상 기록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관영이 면천을 떠난 다음해 암행어사의 보고서에 다시 등장 한다. 1857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서승보는 혈기왕성한 35세의 관원으로 충청도를 탐문하며 홍산 군수와 수어사를 징치하고 태안관아에서는 그 유명한 어사출도를 하면서 관아의 모든 창고와 서류를 봉고한다. 태안군수 오치영이 안면도의 금송을 무단으로 벌채하여 상인들에게 팔고 태안에 자신의 별장을 건축한 것이 밝혀져 의금부에 나포되어 처벌을 받는다.

이관영은 전직이었지만 재직 시 대규모로 면천읍성 보수와 관아보수 공사를 벌여 세수를 탕진했다하여 서승보의 탄핵을 받았지만 용서 받는다.

이관영이 현판을 지은 풍락루는 당송시대의 문인들의 문학에 등장하는 루정의 명사다. 면천성의 원기루, 원경루, 반월루, 군자정 등이 모두 남조시대 이후 당송 시대의 루정 문학의 명사들이라면 이해가 빠르다. 박지원이 골정제를 보수하고 지은 정자 ‘취옹희우정’도 구양수와 소식의 행적에서 취해 온 것이다.

이관영은 아름답고 찰진 시를 많이 썼다. 안산군수 면천군수 등을 거치며 고향 영남으로 내려가 말년을 보내던 그의 시 한수를 소개 한다.
 
슬프다. 횐 머리의
한없는 이 아픔을
늙은 아이 엉엉 울어도
어쩔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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