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17회 3장 [[서로(西路)의 상인(3)]]
[연재소설 청룡도] 17회 3장 [[서로(西路)의 상인(3)]]
  • 이 은호 작
  • 승인 2019.08.13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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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군칙.

홍경래난의 최종 보고서인 '순조신미별등옥'에는 우군칙의 이름이 우용문(禹龍文), 군칙은 호로 나온다. 우군칙은 자(字)를 장서(將西)라고 했다고 한다. 봉기 당시의 나이가 36세로 홍경래보다 5~6세 적고 잠상(밀무역) 전과자로 (처이모부) 강득황을 앞세워 고리대금업에도 나선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우군칙은 호와 자까지 지어 갖고 있을 정도로 스스로 양반 신분임을 자랑하면서도 잠상과 고리대금업까지 손을 대는 등 자금을 모으는 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인물이다.

“물건을 모두 임행수에게 맡겨.”
“형님, 들어준답니까?”
“거절을 하지 않았으니 들어준다는 거겠지? 그런데 홍삼이 그리 이익이 많이 나나?”
홍경래가 우군칙과 선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선아는 새로 산 옷을 입고 우군칙 방안에 들어와 있었다. 황색물감을 들인 치마저고리를 입은 모습이 아기 기생이 따로 없었다.

“국경을 넘으면 무조건 세 배입니다. 요즘 워낙 국경의 검수가 심해 힘든데 만상에 넘겨도 두 배는 보장됩니다.”
“물건 확보가 문제 아니냐?”
“송상에서 일부 빼왔고 증포소에서도 빼 오는 방법이 있으니  되는  장사입니다.”
송상(松商)은 개성상단을 말한다.  송상은 일찍부터 인삼의 효능을 알고 인삼을 상품화시켜 중국 일본 등에 수출을 해 왔으나 인삼의 대규모 재배와 수출은 18세기에 와서야 본격화된다. 자연산과 채집산 위주의 기왕의 방법으로는 대량 생산과 대량 수출을 꿈꿀 수 없었고 17세기 말에 비로소 개발된 전작(밭) 재배법이 송상의 자본의 뒷받침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간 것이 정설이다.
더구나 인삼은 말리지 않은 탓에 운반과정에 상하는 경우와 복용과정에 탈이 나는 등의 부작용이 있어 대량 보급에 문제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증포법이 나오면서 드디어 조선의 인삼은 비상을 하게 된다.

“그래 몇 근이나 확보했나?”
“형님, 놀라지 마십시요? 삼백 근이 있습니다.”
“삼백 근이 큰 돈인가?”
“아이고 형님, 지난번 연경 사행단 이 경비로 가져간 홍삼이 이백오십 근입니다.”
“그래?”
홍경래는 홍삼 3백 근의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에 놀랐다. 6백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 상행단의 경비를 기백 근의 홍삼이 당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형님, 홍삼이 노다지입니다. 팔포 열 짐보다 홍삼 몇 근이 비싸다니까요.”
우군칙이 홍삼을 거듭 예찬했다. 작은 수량으로도 만금을 대신한다는 것은 먼길을 가는 사신단이나 상인들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것일 터이다.

“하여튼 너의 분발이 필요하다. 장차의 일은 모아지는 자금이 성패를 가를 테니까. 김사용과 희저 형님 그리고 군칙 너 세 사람의 책임이 막중해.”
홍경래가 말하는 김사용(金士用)과 이희저는 모두 도고 상인이다. 김사용은 선천 의주 일대를 무대로 상업을 하며 무예가 출충한 이제초(李濟初)와 의형제를 맺고 의주 채단에 맞서며 홍경래와 연합전선을 펴고 있는 중이었다.

“열심히 자금을 모으겠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서기로 쓸 참이야. 단에 새로 들어온 아이다. 눈치와 강단이 있어. 그리고 한문에 능통한 보배다.”
홍경래가 선아를 자랑스럽게 소개를 했다. 선아가 우군칙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하하 단의 서기라니 반갑다.”
우군칙이 선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서기도 보통 서기가 아니다. 너 시경을 꾀고 있는 서기를 본 적이 있니?”
“네에? 이 아이가 시경을 안다는 말입니까?”
우군칙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렇다 마다. 한번 시험을 해봐라. 장봉사도 찬탄을 하더라니까.”
“…하하 그렇습니까? 장봉사가 인정을 했다면 꼬랑지를 내려야지요. 유서기 앞으로 잘 모셔야겠구나.”
“암, 잘 모셔야 하다마다. 하하하.”
홍경래와 우군칙이 몸둘 바를 몰라 하는 선아를 놀리기라도 하듯 웃으며 말했다. 방안으로 저녁상이 들어 왔다. 늦은 저녁이었다. 상은 방에서부터 마루 끝까지 길게 놓여졌다. 홍경래와 우군칙 그리고 선아가 겸상을 했고 춘대 일행이 다른 상 앞에 앉았다. 홍경래는 한사코 춘대의 상으로 가려는 선아를 잡아 놓았다.

“먹자!”
홍경래는 수저를 들며 코끝이 찡긋했다. 용천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난 탓이다. 홍경래는 사남(四男) 중 세째였다. 위로 형 홍명래(命來)와 창례(昌來) 그리고 동생 정래(鼎來)가 있었고 용강 신포에는 아내 최소사(崔召史)가 사내 아이 둘을 키우고 있었다.
 홍경래는 용천에서 홍가(洪哥)로 불렸다. 신포(信浦)란 호는 외숙 유학권이 고향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호를 지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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