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칼럼] 신화로 역사읽기.
[충청 역사칼럼] 신화로 역사읽기.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8.1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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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투데이/ 이청 논설위원]

-나는 스파르타와 모래가 많은 필로스로 가서 오래전에 떠나고 안 계신 아버지의 귀향에 대해 알아볼 참이라네.

오디세이아의 한 구절이다. 나는 이 여름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우리 역사 읽기의 한 텍스트로 읽었다. 영원한 신의 법과 맹목에 이르는 인간의 미망이 스쳐간 자리에 폐허처럼 남아 있는 허망의 자리까지도 아낌없이 보여 주는 이 신화를 읽으며 동명과 주몽 그리고 단군이니 난정이니 하는 우리의 고대의 신화를 새롭게 인식을 하며 역사의 층층에 화석으로 남은 우리의 고대사의 한 페이지를 생각했다.

신화속을 떠돌다 사라진 아버지 오디세우스를 찾아 나선 텔레마코스는 모래가 많은 필로스에 가면 오랫동안 어디론가 떠나 안 계셨던 아버지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는 각오를 말한다. 오디세우스는 신화를 찾아 시간을 떠도는 영혼이다. 그의 탐구욕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아들 텔레마코스를 통해 또 한번 시간의 바다를 항해한다. 그들 부자는 신화 속에서 시간의 층층을 찾아다니며 어떤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다.

ㅡ사실 한국의 초기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에는 수많은 부족 사회가 있었고 각기의 형성 신화를 갖고 있었다. 그후 몇개의 부족 사회로 통합하며 건국 신화가 되었고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이 그렇다.

신화는 초기 국가의 발전 단계의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다. 뜬금 없는 듯해 보이는 신화의 표피를 벗겨 보면 당대의 어떤 사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종욱)

우리 고대사의 초기 국가들은 저마다 건국 신화를 갖고 있는데 이것을 단군 신화와 비교를 해 보면 재미 있다. 부여를 세운 동명은 탁리국(색리국. 고리국)에서 분가했고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부여로 부터 분가했으며 백제의 온조는 고구려로부터 분가를 한다.

그리고 박혁거세 김알지 석탈해도 어디선가 온 사람들이다. 김수로 허왕후는 배를 타고 온다.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신시를 연 환웅도 어디서부터(하늘이라 했다) 분가를 해 온다. 환웅은 환인에게 천부인 3개와 무리 3천을 받아 왔다고 했으니 이는 어느 정도의 국가의 실체가 있던 세력에서 분가를 해 나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의 지도자인 단군이 지역의 원주민인 웅족과 호족을 포용 또는 복종시켜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온 과정이 바로 단군 신화라는 해석 말이다.

ㅡ옛 기록에 전하기를 신작 3년 임술(기원전 59년) 4월 8일 천제가 흘승골성에 내려왔는 데 오룡거를 탔다.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했다. 국호를 북부여라 했고 해모수라 칭했다. 아들이 부루다. 해(解)는 성이다.

부루는 후에 상제의 명으로 동부여로 도읍을 옯겼다. 동명제는 부부여를 이어 흥기하여 졸본주에 도읍을 세우니 고구려다. (삼국유사)

동명으로 대변되는 부여의 건국 신화는 곧바로 고구려와 연결된다. 중국의 사서인 논형에 전하는 동명은 탁리국의 왕자로 부왕과 갈등을 빚다 남쪽으로 도망을 나와 나라를 세운다. 이 과정을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주몽이 반복을 하며 건국 신화로 사용을 한다.

단군과 동명 그리고 주몽의 건국 신화는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분가를 한 온조의 기록은 신비함을 털어내고 거의 사실적인 모습을 취한다. 이 점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과정에 이유가 있다. 삼국사기는 편찬 과정에서 지나친 신비성을 모두 제거하거나 순화시킨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동명과 주몽 그리고 온조가 아버지를 극복하는 과정이 바로 건국기로 연결되고 있음을 본다. 동명은 탁리국에서 주몽은 부여에서 온조는 고구려에서의 부왕들과의 갈등을 보면 말이다.

이들은 지금의 편안한 (자국의 왕자로) 고향에서 모래가 많은 필로스( 황무지이자 신천지)로 가서 자신들을 후계자로 삼지 않은 부왕들에게 멋진 나라를 세워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동명이 분가를 한 탁리국은 고조선의 한 갈래였다는 연구가 있다. 서기전 5세기 고조선의 혼란기에 한 세력이 탁리국으로 분국을 하여 나왔다는 것이다. 이 논문을 접하고 나서야 나는 오랫동안 갖고 있던 고조선과 부여에 대한 의문을 어느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단군 동명 주몽 온조 박혁거세 등의 신화를 잘 읽어 보면 문자로 기록하지 못하던 시대의 역사가 있다. 어디선가 단군이 부족을 이끌고 와 고조선을 세운다(그전에 요동 요서 한반도 등에는 산곡에 퍼져 살던 원주민이 있었다) 고조선이 서기전 5세기 혼란을 보이기 시작했고 탁리국이 분가해 나갔다.

탁리국에서 부여가 분리해 나간다. 탁리국이 망했고 고조선이 망했다. 망한 고조선의 유민이 바다를 건너 평양 지역과 전북 익산(마한) 지역으로 들어와 마한을 세운다. 평양에 들어왔던 박혁거세 김알지 등이 6부족(경상도)으로 이동하여 신라가 된다. 부여에서 고구려가 고구려에서 백제가 분가했다. 부여가 망했다.

이를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정리한다. 고조선의 고인돌 양식과 세형 동검 문화는 평양 마한 신라 지역에 분포한다. 그러나 부여 고구려는 지석묘 대신 적석총이나 잔돌 양식의 무덤 형식으로 분류된다. 부여는 잔돌 양식이나 돌무덤 형식 등으로 고조선과 차별을 두고자 했다(부여는 고조선을 극복 하고자 했을까).

문헌사와 고고학적 신화의 해석의 성과를 토대로 볼 때 고조선이 우리 한민족의 시원임은 틀림이 없다는 결론이 얻어진다.

오디세이야는 일리야드와 함께 한 작가가 썼다는 설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 있다. 호메르스의 서사로 전해지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의 고대 신화를 생각해 본 것이 엉뚱한 것일까. 신화가 신화로서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신화 속에 진실이라 믿는 것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여름 나는 우리의 고대사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고있다. 고대사가 밥먹여주나 하신다면 할말이 없다. 책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그저 나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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