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칼럼] 추사 김정희 한원진에게 봉변을 주다.
[충청 역사 칼럼] 추사 김정희 한원진에게 봉변을 주다.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8.08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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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식자들은 시(詩)를 기본으로 주역을 알아야 했으며 사기(史記)를 읽고 두루 펼쳐 낼 수 있어야 했다. 문장과 철학과 역사에 해박한 경지가 식자들의 수준을 갈랐고 이 수준의 차로 조선 시대의 전 식자층의 서열이 정해질 정도였다. 다산은 이속에서 우뚝했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를 와 있을때 전라 경상도의 식자들이 그를 주목 했고 그와 교류하기를 소원 했다.다산은 몰락한 식자였지만 당대의 세도 문벌인 노론의 사족들의 관심을 끌 정도로 대단 했다. 노론 사족의 대표 주자가 추사 김정희다.

추사는 다산의 아들인 학연의 연배로 다산과 나이차가 많았지만 학문의 장에서 구별을 두지 않았던 다산의 관심으로 교류를 갖게 된다. 그들 사이에는 초의까지 끼어 들어 남도의 전설이 된다. 추사는 말할것 없이 시서화 삼절이다. 문장 서예 그림등의 분야에서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하여 당시대 한중일 삼국에 알려진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추사는 고단한 삶과 여건으로 고생 하던 위항의 선비들과는 달리 노론 계열의 경화사족으로 일찍부터 조정의 주목을 받고 승승 장구한 인물이다.

추사가 과거에 급제를 하고 얼마되지 않아 순조의 명을 받고 충청 우도 암행어사로 발탁되어 활약을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추사는 1826년 6월 '충청우도암행어사서계별단'이란 긴 제목의 보고서를 일성록에 남겨 놓고 있다. 추사는 6개월여의 암행어사 활동을 통해 충청우도에 만연한 사회적 부조리를 강력하게 지적 하고 군수 한명을 본보기로 파면을 유도 하여 실제로 그렇게 만든다.

추사가 본 당대의 사회상은 부조리 일색이다. 이미 문란해진 삼정(군역 세금 토지)과 삼정의 문란을 부축이는 악질적인 지방 토호들과 관리들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추사의 고발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이미 부정부패는 조선의 고질병이 되어 있어 있던 탓이다. 그런데 추사는 이 보고서에서 흥미 있는 건의를 하고 있다. 안면도를 절개 하여 조운의 편의를 도모 하자는 안면도 운하 계획을 검토 하자는 것이다.

안면도는 경상 호남 지방의 곡물이 한양으로 들어 오는 가장 중요한 해로상에 있고 특히 안면도 외해는 파도가 높아 수많은 조운선들이 침몰 하는 사고가 빈발 하여 고려부터 조선 시대를 거쳐 안면도 운하의 필요성이 지적 되어 온 곳이다. 중종 연간은 실재로 상단한 진척을 보이다가 중지한 사실도 있다. 추사는 이 운하의 조속한 착공을 건의하고 순조 또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검토를 한다. 그러나 더이상은 논외다.

추사는 결과적으로 이 암행어사 시절 탄핵한 군수의 재탄핵을 받고 아버지 김노경이 실각 하고 추사 자신도 얼마후 일단의 측근들과 귀향을 가게 된다. 추사의 귀향은 일정 부분 그의 모난 성격 때문인듯 하다. 암행어사로 충청도를 돌며 직지사에서 남당 한원진의 책을 찍은 목판을 보고 퇴계선생을 거스르는 작이라며 불태워 버린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추사는 북한산에 올라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하고 비문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기도 했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간다. 좋은듯 나쁜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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