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도림사는 칠악사인가.
[기획] 도림사는 칠악사인가.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29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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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잃어버린 산 칠악, 그리고 칠악사는 언제 우리에게 실체를 보여줄까?

[충남투데이 /이 청 논설위원] 칠갑산에는 현존 하는 사찰 몇개가 있다. 장곡사와 정혜사 그리고 폐사지인 도림사(道林寺)다. 도림사는 지표 조사를 통하여 장평면 도림리에 있는 현재의 사지에서 도림이란 명문 와당을 수습 한바 있다. 그외 기록에 전하는 몇개의 사명과 사지(寺地)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그리고 신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정혜사 묘봉사 도림사 장곡사가 칠갑산내의 사찰로 전한다. 묘봉사(妙峰寺)는 정산면 와촌리에 있는 사지로 추정 된다. 도림사의 반대편 산록으로 앞으로 앵봉산을 마주 보는 좋은 자리다. 뒷산이 요봉(妙峰)으로 불린는 것으로 보아도 그렇다. 이외 낙지리 사지와 몇곳이 더 있으나 조선 시대의 사찰이다. 고대의 기록중에 더이상의 칠갑산의 사지나 사명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산면 서정리에 있는 하사(下寺)지다.

하사는 정산면 소재지의 넓은 들에 우뚝 서있는 보물로 지정된 9층 석탑이 있는 사지다. 서정리 사지로 전하는 하사(下寺)는 1960년대 9층 석탑을 해체 보수 하고 부근을 지표 조사 하여 수습한 명문 와당에 전하는 사명(寺名)이다.

와당에 좌서양각으로 下寺명문이 보고되어 1990년판 충청남도 문화재 대관에 수록이 되어 있다.

하사는 9층 석탑이 보여 주듯 대단히 컷던 절로 보인다. 탑이 고려 시대 양식으로 밝혀 졌으니 최소한의 년도가 고려 시대다. 당시 조사 책임자였던 부여 박물관 홍사준 관장과 훗날 국립 박물관장을 역임 한 황수영은 이 탑의 연원을 고려 초기 이전까지도 잡을 수 있다고 의견을 내고 있다. 그리고 이 부근에는 이와 동형의 탑이 한 점 더 있었다고 한다. 9층석탑 2기가 있었던 것이다.  9층석탑은 우리 나라에 드문 탑이다. 이로볼때 이 절의 크기를 가늠 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사찰의 이름이 어색하다.  이유는 하사가 본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절은 따로 있었다.

그렇기에 당대 최고의  기록들이 '하사'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하사'는 도림사나 여타의 절들에 견주어 절대로 경쟁력이 뒤지지 않는다. 특히 교통로에 근접한 점에서 더욱 그렇다.

위의 기록에는 칠갑산 사명을 적으며 바로 인근에 있는 계봉산도 언급하고 있다. 계봉사 남포사 서련사(瑞蓮寺)다. 계봉산은 하사에서 지척의 거리다. 그렇다면 하사는 칠갑산과 계봉산에서 모두 빠진꼴이 된다.  계봉사는 김정호도 언급한바 있을 정도로 만만찮다. 성왕때 세운 절이란 믿음성이 약한 기록도 있다.

남포사나 서련사의 위치는 비정조차 할 수 없다. 혹시 인근 남천리에 있는 3층석탑이 있는 정도는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 뿐이다. 이 탑도 고려양식이다. 석탑은 백제 말기에 와서야 겨우 생긴 양식이니 통일신라나 고려 시대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석탑을 만든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석탑의 효시가 정림사탑과 미륵사 탑이다.

필자는 서정리 하사의 기능 목적이 밝혀지고서야 칠악사를 규명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사지는 칠악의 뒷마당에 해당 한다. 칠갑산 정상에서 남서로 앞을 바라 보고 있는 곳에 자리한 곳에 칠악사가 있었다면 그 뒤의 넓은 평지에 하사(下寺) 아랫절이 조성 되었다.  결국 칠악에 있던 칠악사가 윗절이었고 산 아래에 있는 하사는 아랫절이었던 거다.

칠악사가 후에 도림사로 사명이 바뀌면서도 도림사와 하사가 분류가 되지 않고 영속성을 갖았기에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같은 국가적 기록에서 제외된 것이다. 도림사와 하사는 한 절이었던 탓에 두건으로 기록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이것외 다른 설명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도림사는 칠악사였나. 칠갑산에 두솔성이 있다고 했다. 두솔(豆率)은 도솔(道率)이다. 도솔천(道率天)인 것이다. 도솔천은 불교에서 이상 세계를 말한다. 도솔천에서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다는 향가도 전한다.

무왕은 칠악에  성을 쌓고 두솔성이라 했다. 이상세계인 도솔천을 지키는 성이기를 원했을 것이다.

도솔은 도림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도리천(道利天)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도림사지가 칠악사였나. 그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도림사가 칠악사의 이전 이름이  분명 하다.

필자는 지난 십여년을 두고 도림사를 50회 정도 올라 보았다. 달빛 아름다운 밤에도 올랐고 3층 석탑에 거대한 말벌집이 있던 봄에도 올랐다. 폭설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꺽여 길을 막았던 겨울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도림사는 말이 없었다. 누가 오는지 가는지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지 마는지를 도림사는 분지 모양의 품을 열어 그저 집 나간 남편을 오래 도록 기다린 조강지처 마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때 나는 이 산록에서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소위 청양선생으로 불려 오던 이 지역의 전설같은 사람이다.

청양선생은 야산 이달이다. 그는 주역의 대가로 1968년 은산에서 돌아가신 분으로 그의 제자 중에 대산 김석진옹이 있고 아들중에는 역사학자 이이화도 있다. 야산은 화산의 중석 광산에 제자들과

일을 나와 번 돈으로 은산에 삼일단을 세우고 제자들을 육성 했다. 그 제자중의 한사람이 도림사에서 나를 만나 한가지 중요한 단서를 준다.  그는 이 근방에서 커다란 수로를 본적이 있다 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도 능히 빠져 다닐 정도였다 했다. 야산 선생은 도림사지를 여러번 올랐던 모양이다. 선생은 도림지가 '서기만당'의 명당터라 했다. 한가지 부족한것이 도림지로 내려 오는 기맥을 신작로가 막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신작로는 정산 청양간의 국도다  마티제 말이다.

나는 야산 선생의 행적을 탐문 했다. 야산은 정역 김일부와 탄허선사에 견주는 20세기 최고의 주역의 권위자다. 그의 제자 김석진옹도 스승을 이어 작금의 명실 상부한 주역의 대가였다.

그 세계에서 그는 독보적이었다. 그가 스승 야산을 일러 동방의 공자라 했다. 나는 한탄을 했다. 동방의 공자가 안타까워 하던 도림지였기에 그토록 내가 도림사에 빠졌던 것일까. 진정으로 좋은 것은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칠갑산의 남서쪽 340미터에 오르면 깊은 계곡위에 분지형 지형이 나온다. 2000여평의 비교적 넓은  산록위에 7미터 정도의 3층 석탑이 외롭게 서있는 곳이 바로 도림사지다. 3층 석탑을 중심으로 남북 선상에 사찰의 건물 배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평지위에 잡초와 대나무 뿌리등이 엉켜 도무지 옛날의 모습을 짐작키 조차 힘들다.

이곳이 조선조 최고의 지리지인 신동국여지승람 정산조에 나오는 도림사로 사찰의 지명이 사곡(寺谷)  절골  적곡(赤谷)으로 변화 하며 행정면으로 까지 이어온 도림사지다. 도림사지는 73년대 지표 조사에서 도림(道林)이란 명문 와당이 수습 되었고 3층 석탑의 해체 보수시 방형 사리구가 수습되어 부여 박물관에 보관 되어 오고 있다. 3층 석탑은 안정된 모습과 사탑의 형태가 고려시대 양식으로 파악 되었다. 주변에서 수집되는 와편과 토기 파편등은 이 사지가 고려시대 창건되어 조선 초기까지 유지 되다 폐사된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3층 석탑과는 다르게 온전히 파괴된 석등과 탱주석 그리고 작은 석불 한점이 더 발견되었다.

도림사지의 지표 조사는 그야말로 지극히 초보적인 기초 자료의 정리 보고로 법당의 위치나 가람의 모습도 원형을 가늠하지 못할 정도의 약소한 것이다. 본격적인 발굴을 위한 기본적 자료도 수집 또는 정리가 안된 것이다.

나는 이 근거를 사지내에 있는 탱주석과 계곡 아래 있는 석불을 든다. 이미 지표 조사에서도 석탑과 탱주석 석불등의 재질이 다르다는 것이 조사 된바 있다. 거의 완전한 모습의 3층 석탑과는 다르게

완전 마모된 탱주석과 석불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가. 탱주석 석불은 인위적인 파괴로 보인다.  탱주석과 석불은 정교한 무뇌와 부드러운 선이 아름답다. 이것은 3층석탑과 탱주석 석불이 같은 시대의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 사지위에는 고려 조선 시대의 와편 토기편이 줄비하다. 60년대 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민가가 있었다. 민가에서 쓰던 잔재도 눈에 보인다. 나는 이 주변에서 한 사람이 보았다는 수로의 존재를 찾아 보았다. 그러나 방수 시설로 보이는 수로의 흔적으로 잔돌 무더기를 몇곳에서 본것이 전부이다. 눈으로는 더이상 어떤것을 추측하기 힘들 정도로 사지는 폐허가 되어 있다.

도림사지는 칠갑산성에서 수백미터 비켜 앉아 있다. 산성안에 도림사지가 있던 것이 아니라 산성의 바깥에 위치한 것이다. 산성의 흔적도 도림사지 이상으로 폐허화 되어있다. 성의 흔적을 겨우 도림사 입구 계곡과 산정상에서 내려 오는 산능선을 따라 간헐적으로 성터의 흔적을 겨우 파악할 정도다. 특히 산성과 도림사지가 태극 모양으로 엉켜 있어 주의를 하지 않으면 산성내에 사지(寺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재는 그렇지 않다.

산성을 지키는 장병들의 무훈을 빌기위해 세운 사찰이란 해석이 애매 하다. 사찰의 건립과 산성의 건립의 목적이 맥을 달리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칠갑산성과 도림사는 서로 연관이 없는 것인가.

나의 칠악사 찾기는 이곳에서 암초를 만난다.  도림사는 칠악사였고 백제 무왕이 쌓은 각산성이 칠갑산성이란 나의 주장이 논점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도림사지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도림사의 조망을 보기위해 산을 올라 헤메던 나의 눈에 보인 커다란 바위였다. 바위는 어디선가 본듯 낮이 익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초기 기록에는 동명묘가 여러번 보인다. 위례성 동쪽에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 기록으로 고고학자중에 하남시 검단산을 지적한 사람도 있다.

나는 검단산 정상부근에 있는 칠성바위와 제단석을 답사한적이 있다. 바로 그 바위와 비슷한 바위를 칠갑산록에서 발견한 것은 우연의 일이었다. 백제 왕실은 바위를 신성시 했다. 삼국유사에 보이는 정사암이 그것이다. 정사암은 지천과 금강이 만나는 지점에 보이는 천정대를 말한다.

나는 이 바위 주변을 살피다가 또 하나의 사지(寺地)를 발견 한다. 그야말로 야산의 구릉과 잡초가 우거진 산곡에서 천오백년을 잠자고 있던 절터가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곳 저곳을 살피다 오랜 풍상에 마사토로 변한 한줌 흙속에서 조개껍질같은 와편의 잔재들을 보았다. 적어도 이 일대에 한해서는 역사 학자들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자부 하던 나의 눈에 처음 띈 사지라면 이건 사건(?)이다.

그랬다. 이곳이 칠악사의 본당이었다. 칠악사는 거대한 사찰은 아니다. 백제의 사찰은 미륵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큰 사찰은 아니다. 목탑을 중심으로한 대웅전과 회랑 구조인 1탑1금당의 단아하되 아름다운 형태의 조촐한 양식인것이다. 백제의 사찰은 평지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하늘에 제사 하던 성격의 칠악사기에 산곡을 택한 것이다.

법왕이 기우제를 지내기위해 찾아온 원악(原岳) 칠갑산은 동악(계람산-계룡산) 북악(오서산) 서악(반남산-월출산) 남악( 무오산-지리산)과 더불어 백제의 5악 신앙과 5방 사상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칠악사는 이곳에 있다가 언젠가 도림사지로 이동한  것이다. 3층 석탑은 그 후 조성된 것이고 탱주석과 석불은 옯겨온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이 사지의 발견을 몇몇 학자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이곳에서 수습한 백제 와편과 사지의 조성도를 작성 하여 보여주고 한 학자를 직접 대동 하여 현장을 확인 시키기도 했다. 결론은 '고대의 절터임은 분명 하나 속단은 하지 말자'였다.  도림사지와는 5백미터 정도 거리가 있어 그곳의 와편이 이곳에 산재할 이유가 없고 백제 양식의 와편과 토기 파편은 연구할 대상이란 긍적적인 말도 들었다.

이 사지가 전설의 칠악사일것인지는 조만간 있을 지표 조사에서 결판이 날것이다. 물론 행정 기관을 통한 절차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한가지 두려운것이 있다. 칠악사가 아닌 별 볼일 없는 절터로 판명 나면 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작가의 백일몽으로 끝나겠지만 과연 칠악사지라면 이건 조사를 담당한 역사학자들의 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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