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역사칼럼] 홍주와 태고 보우
[충청역사칼럼] 홍주와 태고 보우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10.30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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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투데이 / 이 청 논설위원] 홍성군이 천년 홍주를 슬로건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펼치고 문화 역사방면의 스토리텔링의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역사는 지나간 것이지만 오늘과 미래의 비젼이기에 오늘 백번이라도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아름다운 덕목이다.
홍성의 원 이름은 홍주다. 홍주는 1012년 고려 현종때 홍주라는 지명을 득했으나 5도양계 12목 체계의 고려 행정 체계의 정식 목(牧)으로 승격된 것은 1356년 공민왕 5년의 일이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르자 이미 사망한지 50년이 된 태고보우(太古普愚)를 기리며 태고의 고향(內鄕)인 홍주를 목으로 승격 시킨 후 오늘에 이른다. 역사사전은 태고 보우를 이렇게 전한다.

태고보우(太古 普愚)
 (1301~1382). 고려 말기 스님. 태고(太古)는 호이다. 속성은 홍(洪)이며, 홍주 사람이다. 13세에 양주 회암사에서 광지에게 출가하고, 가지산 하총림(下叢林)에서 도를 닦아,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한다. 용문산 상원암ㆍ성서(城西)의 감로사에 고행 정진하였고, 1337년(충숙왕 복위 6) 송도 전단원(栴檀園)에서 참선하다가 다음 해 정월에 크게 깨닫는다.

이에 삼각산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을 짓고 있으면서 태고라 호(號)하고 태고암가를 지었다. 1346년(충목왕 2) 중국에 가서 호주 하무산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잇고 동국(東國) 임제종의 초조(初祖)가 되다. 다음 해 본국에 돌아와 용문산 소설암에 있었다.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법을 묻고, 왕사(王師)를 삼아 광명사에 원융부(圓融府)를 두고 9산(山)을 통합하여 1종(宗)을 만들게 하였으나, 뒤에 사퇴하고 소설암으로 옮기다.

신돈(辛旽)이 투기하여 속리산에 금고(禁錮)되었다가, 신돈이 죽은 뒤에 국사가 되었다. 우왕 8년 12월 24일 소설암에서 입적하니, 세수 82세. 법랍 69세 였다. 시호는 원증(圓證)이고, 탑호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가 태고사에 있다.
보우선사는 중국 불교 선종의 전법 제자다. 보우선사를 조종으로 한 불교 종단이 한국불교 최고종단인 조계종이다. 태고보우는 이렇게 선(禪)을 말한다.

옛 시내를 흐르는 차가운 물은
한입에 마시다 이내 뱉었네.
도리어 출렁이는 물위에
미목도 완연하다 조주의 모습.
(古潤寒泉水/一口飮卽吐/怯流波波上/趙州眉目露)

선은 말 없는 말을 바다로 삼고 문자 없는 문자를 배로 만들어 손가락 하나로 방향을 잡아 온전한 나를 찾고 나로 돌아가자는 불교로 태고의 영향은 오늘날 한국 불교의 초석이 된다. 홍주가 그를 잊은 것은 아니다. 홍주성안에 태고보우가 심었다는 나무가 있고 간발적인 그의 보도 자료가 나오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이번 홍성군 역사인물 선정 6인중에 그가 배제된 것은 유감이다. 홍주에게 태고 보우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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