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역사시리즈 ] 치욕적 대접받는 예산 독립운동사
[예산 역사시리즈 ] 치욕적 대접받는 예산 독립운동사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9.01 1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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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독립운동사에 수록된 1074명중 예산 출신은 34명으로 충남 15개 시 군 중 최하위권

[충남투데이 /이 청 논설위원] 안희정지사 때 출간된 충남독립운동사에 독립유공자 1074명의 명단이 나온다. 1900년대의 독립운동을 범주로 의병 삼일운동 학생운동 항일독립 운동에서 훈포장을 받은 인물들을 수집한 자료로 사업 주체가 충남역사문화원이다.

이 1074명을 시군별로 분류해보면 홍성군이 178명으로 가장 많고 청양군 150명 당진시 135명 천안시 64명순으로 태안 3명과 더불어 예산군은 34명으로 나타난다. 홍성 청양 당진이 유독 수록자가 많은 이유는 홍주의병과 삼일운동에 대한 선행 연구가 활발했던 이유로 보이지만 예산군과 태안군으로 좁혀 살펴보면 아쉬움이 많다. 특히 3명으로 조사된 태안군 독립 유공자의 경우는 충남독립운동사라는 타이틀이 아까울 정도다.

충남독립운동사의 태반이 삼일운동 관련자다. 선행연구가 잘 되어 있는 천안, 청양, 정산. 당진 대호지면등에서 삼일운동 훈포장 수여자가 많은 탓이다.

삼일운동 관련 훈포장자는 홍성 148명 청양 112명 천안 42명으로 조사 되었는데 예산군은 7명으로 이 조사가 신빙성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삼일운동은 충청도에서는 예산이 가장 먼저 봉기한 곳이다.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한 삼일운동이 전국으로 번지기 시작한 것은 3월 말에서 4월 초로 충청도 청양 홍성 천안 운동들도 대부분 그 시기에 해당 한다.

그런데 예산 한내장부터 시작된 삼일운동은 파고다 공원과 거의 같은 3월3일부터 6일까지 덕산 삽교 신양 예산으로 번져 수백명이 만세운동을 펼친다. 예산만세운동은 한달달여를 두고 계속 되었고 일경의 총경으로 사망자가 10명 부상자가 수십명이 속출 했고 30여명이 검거 투옥되는 대사건이었다. 다시 상황을 보도 한 매일신보는 모인 군중이 3천명을 넘나든다고 했다. 이 사건을 시발로 홍성 청양 천안 정산 당진 대호지면에서 대규모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번 충남독립운동사에서 이 사건은 단 한 줄도 언급이 없다 보니 홍성 148명 예산 7명이란 결과가 나온 듯 하다. 예산은 충청지역에서 가장 깨어난 고장이다. 1920년 7월 전국노동자공제조합 예산지부가 결성되어 3백여명이 가입했고 오가면에서 소작쟁의가 충청도에서 처음으로 일어날 정도로 의식이 깨어 있었다. 1923년 8월 오가면 소작쟁의는 예산공립보통 학교에서 수백명이 모여 항거하다 면장을 끌어다 구타 했고 이어 옥계리 삽교 소작농들이 들고 일어났다. 예산 노동조합 결성은 주변에 영향을 미쳐 곧바로 홍성 인력거 조합이 생길 정도였다.

예산의 깨어 있는 의식이 빛을 발한 사건은 1928년 극단 만경좌 예산 공연장을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이었다. 만경좌는 친일문화를 보급하는 경성의 어용 극단으로 홍성 서산을 거쳐 예산 공연을 하다 지역민들의 습격으로 난장판이 된다. 이 사건으로 처벌 받은 사람이 수명이다.

1920년 대흥보통학교 학생들이 총 동원된 동맹휴교와 만세운동 사건은 가담자만 20명에 달했고 강봉주가 주도 했던 예산농림 독서회 사건만으로 옥고를 치룬 사람이 7명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삼일운동 관련 유공자가 7명이란 것은 언어도단이다.

강봉주 ‘예산농업학교독서회사건’으로 알려진 예산공립농업학교 비밀결사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예산농업학교 학생이었던 한정희는 정종호, 강봉주 등과 함께 독서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독서회를 기반으로 1932년 5월 사회주의 이념을 기초로 한 사회를 건설한다는 목적으로 ‘좌익협의회’를 조직했다.
박정순과 한정희는 1932년 6월 학교측이 일요일에도 불구하고 권농일이라는 이유로 등교를 시키자 ‘학생동원의 부당성과 한인학생들의 차별정책 철회’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좌익협의회 학생들이 퇴학처분을 받아 조직이 와해 되자 1932년 9월 강봉주, 정종호, 박희남과 함께 예산공산주의학생동맹을 조직해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이들은 조직의 명칭을 ‘토요회’로 변경하고 학생들을 규합하기 시작했으나 같은 해 11월 친일 연극 상연반대투쟁을 벌이던 중 일제에 발각되어 체포됐다.

이들은 모두 실형을 선고 받는다. 이들 학생들이 좌익이란 시선으로 연구 대상에서 제외된 점등이 에산독립 운동사를 왜소화 시킨 점도 있다.

독립운동은 의병운동 만세운동 항일운동 독립단체 후원운동의 다양한 방식의 항일운동의 총칭이다. 예산의 독립운동은 예산을 넘어 전국적이다. 윤봉길의사는 너무 유명하여 논외로 하고 김한종(1883-1921)의사를 예로 든다.

김한종은 홍주 의병에 참가했다 처형 당한 아버지 김재정의 영향으로 일제에 강력한 분노심을 갖고 무장 독립운동의 방법을 찾다 1915년 경상도 경주에서 박상준과 의기투합 ‘대한광복단’이란 의혈 투쟁 조직을 만든다. 김한종은 예산에 싸전을 홍성에 잡화점을 천안에 어물전을 열어 조직의 비밀 거점을 설치하고 고향인 예산 덕산의 동지들인 김상준 김영준 임세규 김경태 김재철 김재창등 30여명을 모은다.

김한종은 청주 충주까지 전주까지 세포를 두며 60여명의 무장 조직을 두고 자금을 모으기 위해 강원도 영월 탄광 사무소를 습격하여 자금을 강탈하고 평안도 운산광산을 습격하는 무력 투쟁을 전개 일본당국을 경악 시킨다.

김한종의 활동은 공개적이다. 충청도 부호들에게 통고문을 보내어 독립자금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수령하는 가 하면 친일파로 부역하며 비협조하는 부호들은 직접 징치하는 방식으로 친일파들에게는 공포의 존재였다.

김한종의 공포감은 1918년 1월24일 밤 아산 도고면장 처형 사건이다. 김한종은 부단장 김한묵에게 지시를 내려 조직의 처단조인 김경태 임세규를 보내어 아산의 부호이자 도고면장을 하고 있던 박한종을 사살해 버린다. 김경태 임세규는 박용하에게 ‘광복단 처형 명령서’를 보여준 후 총격을 가한다. 김한묵은 덕산출신으로 김한종의 행동대였다. 무기 화약 조달은 물론 광산등 습격 사건을 기획한 책사였다.

이 사건은 조선 전체에 대한광복단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한편 일본 군경의 대대적인 공세를 부르는 후과도 낳는다. 이 대목서 우리는 하나 알아야 할것이 있다. 1916년 김한종은 홍성 고향에 내려와 있던 김좌진을 광복단에 가입 시킨다. 김좌진은 자금 모급 활동에 적극 가담하다 만주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김한종은 1919년 3월 박상진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와 사대문 형무소를 거쳐 1921년 8월 11일 하오 11시 사형이 집행되어 유명을 달리 한다.

김한종은 의혈투사다. 그는 비밀스럽게 움직였지만 들어난 사건은 강렬하고 투쟁적이다. 김한종은 제2의 윤봉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무장 투쟁사중 영월광산 운산금광 탈취 사건과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서 일어났던 수십건의 부호 처단 사건을 다시 연구 조사하여 그의 공적을 더욱 들어내야 한다. 그와 함께 예산의 독립운동사에 이런분들이 있음을 기억하자.

-윤봉길 김한종 김원묵 이승복 이종수 김진동 이남규 윤소현 조병언 배덕근 강성희 신하균 강봉주 정종호 한정희 박정순 박희남 오일규 김용재 김상준 김용준 김재정 김재창 이재덕 김재철 김도봉 이원교 김재풍 김경태 임세규 박대영 박창로 성백무 성진호 신현상 성진호 윤자형 이계한 이봉학 이재덕 장문한 이남수 윤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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