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역사시리즈]내포, 내포 문화 그리고 내포의 실체.
[예산 역사시리즈]내포, 내포 문화 그리고 내포의 실체.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08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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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의의 내포는 충청 서북지방이고 협의의 내포는 구만포다.

[충남투데이 / 이청  논설위원] 내포(內浦)를 언급하려면 천구백년 초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913년 5월 예산에서 살립된 호서은행은, 당시 조선 전체 13곳의 은행중 9번째 은행으로 조선인이 대주주인 한성,한일, 산업은행과 더불어 4번째였다. 더구나 호서은행은 지방은행으로는 유일한 조선인 은행이기도 했다.

호서은행은 광천지점 서산지점 천안지점과 경기도 안성지점을 설치하며 영역을 넓히는 한편 예산에 경성제사를 설립 하고 지역의 조선상사를 합병하며 '충남제사'를 자본금 1백만원의 회사로 성장시킨다. 이당시 대주주 성낙규 성낙인 김세호 장석구 김성균등 내포의 상인들이 경강상인 김진규와 손을 잡고 지방에 은행을 설립한 것은 당시 충청도 내포의 경기와 무관치 않다.

지금 내포가 전방위로 논의되고 있다. 지방자치 단체나 학계는 물론 향토사가들을 중심으로 한 내포 조명을 위한 많은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내포는 본디 말인 '안개' 마냥 긴가 민가에 갇혀 선명하지를 않다.

내포를 논할 때면 이중환의 택리지가 빼놓지 않고 거론된다. 이중환이 내포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당시 충청 우도의 상식적 언급에 불과하다. 이중환의 내포 인식은 이중환 보다 50년 정도 선배인 서산 선비 이세양이 1694년 7월17일 승정원일기 똑 부러지게 언급을 한다.

-가야산 하나가 우뚝한 산입니다. 가야산의 남쪽 결성 홍주 동쪽 덕산 북쪽 면천 당진 서쪽으로 해미 서산을 일러 이 지방 사람들이 내포라 합니다.

이 발언은 몇 고을을 더하면 이중환의 발언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이 기록은 내포라는 특정이 없이 범 내포권으로 뭉퉁구려 말하는 것으로 아쉽다. 과연 내포는충청 서북지방을 일컷는 범 내포권을 말하는 것일까? 이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의문을 표시한다. 의문을 뒷받침하는 기록들도 속속 출현 한다. 그중 하나가 태조실록이다.

-충청도 전조(세곡)은 내포(내포창)와 금천(한강 가흥창)으로 모으라.

1412년 태종실록의 기록은 충청(우)도 지방에서 거두는 세곡을 내포로 집결 시켜 한강 가흥창으로 집결 시키라는 말이다. 태조의 이 말은 내포가 범 내포가 아닌 협의의 내포(항)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이 내용을 ‘증보문헌비고’가 잘 설명한다.

-대진포 상류가 융진이다. 세칭 돈곶이라 하는데 이 포구의 상하류 양쪽 강변이 내포(內浦)다. 조수가 융진으로 들어가 신례원까지 닿는다.

융진은 이중환이 말한 유궁진으로 돈곶포(頓串浦)의 다른 이름이다. 돈곶포는 조선시대에는 덕산현 비방면 돈곶리로 1917년 행정 개편시 아산군 선장면으로 편입된 곳이다. 돈곶은 파도를 막기위해 4미터 정도의 대를 쌓았기에 생긴 이름이다.

삽교천은 무한천과 합류되는 상류지점까지 대진포 유궁포 범근내포 우평포 구만포등 십 여개의 포구가 발전했다. 특히 삽교천 일대는 이생포락의 변화로 인하여 어지러울 정도로 지형 변화가 심했다. 극심한 물길의 변화로 삽교천 양안의 포구들의 위치가 고정될 수 없었다.

이 문제로 삽교천 양안은 비월지(월경지) 문제가 심각했다. 일례로 당진시 합덕 전체가 홍주땅이었고 합덕읍 창말 일대가 덕산현의 해창(海倉)일 정도였다. 덕산현 해창터는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276번지 일대로 관사와 40여칸의 창고지가 있었다.

이 삽교천 양안 포구중 가장 유명한 곳이 돈곶포 공세포 구만포였다. 돈곶포에는 관사와 40칸의 창고가 공세포에는 백여칸의 창고와 관사 그리고 3백보 정도의 성을 쌓아 요새로 만들 정도였다. 이중환은 돈곶포를 내포라 여겼고 최남선은 유중진에서 안으로 들어간 곳을 내포라 특정 했다. 최남선의 말은 구만포를 지적하는 말이다. 구만포는 덕산성과 1키로 정도 거리를 두고 발전한 포구로 과거의 기록중 가장 잘 설명한 기록인 ‘오페르트’ 회고록을 소개한다.

-상륙하여 보니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군 사오백명이 성벽위에 포진을 하고 있었다.강기슭에서 도시의 성벽과 거리가 1키로 정도였고 성벽은 요새축조방식이나 약해 보였다. 동쪽으로 20미터 정도 강으로 나와있는 대(臺)가 있었는데 견고한 나무문이 있고 문을 통해 성안으로 드나든다.

오페르트는 160톤급 증기선으로 구만포에 와 백여명의 해적을 이끌고 남연군묘를 습격했다. 오페르트의 기록은 당시 조선의 기록과는 배치된다. 오페르트는 덕산성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다 기록한다. 출동 당시에는 덕산관군이나 관군과 교전한 적도 없고 오히려 관민들의 협조를 받은 듯 기록한다.

조선의 기록은 덕산관아를 불지르는 해적을 맞아 죽기 살기로 싸웠고 해적 몇 명을 잡아 효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구만포는 동래 왜관과 더불어 봉건국가 조선에서 서양 소식이 들어오는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구만포는 예산 봉조원(奉詔院)과 더불어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정보의 집결지였다.

구만포는 포리 새터 새터구만등의 이름으로 불리며 조선조 내내 대포구로 성가를 누린다. 덕산 홍주 대흥 청양 예산의 세곡이 집결했고 가야산의 벌채목과 예당지역의 각종 물상이 인천 한양으로 운반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한번에 구만석씩 쌀이 모인다 하여 구만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구만포에는 1910년 여객증기선 회사가 설립되어 구만포 구양도 선장포 부리포 한진포 인천항을 운행하는 회사가 있었다. 3백톤급 한성호 신용호가 운행을 했고 1930년대에는 아산만에서 증기선 한척이 침몰하여 수백명이 수장되는 아픔도 있었다.

내포의 연원을 추적한 학자중 김추윤이 있다. 충청 좌도에 대한 정밀한 연구를 한 학자로 그는 유궁진이 돈곶포고 돈곶포는 덕산현의 포구였으며 인근에 덕산 해창이 있었다. 고증한다. 최남선은 이 유궁진의 상류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는 지점이 내포다 비정을 했다. 구만포가 내포라는 것이다.

내포(內浦).

내포 삽교천은 바닷물이 밑물일 때 홍성 예산의 턱밑까지 물길이 닿는다. 썰물에 구만포에서 배의 닻을 올리면 쏜살같은 썰물을 타고 단숨에 행담도를 우회하여 안산 앞바다인 풍도까지 도착하는 천혜의 수로였다. 조선의 배사람들과 상인들은 이 조류를 이용하여 내포라는 항로를 개척하고 이용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내포를 묻고 따질 일은 아니라라고 본다. 범 내포면 어떻고 협의의 내포면 어떠랴 그러나 지금 충청도 수도가 된 내포가 더욱 큰 힘을 가지려면 사실의 내포의 역사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구만포에 구만포의 주변에 내포문화의 발상지라는 표지석 하나쯤은 세워야 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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