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호론과 성호학파의 공존
[기획]호론과 성호학파의 공존
  • 이 청
  • 승인 2019.07.2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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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론의 종장 윤봉구와 성호학파의 종장 한 동내에서 살다.
  1785년 6월 26일 정약용은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어 노량진 나루를 건너 29일 예산현 오가원에 도착 같은 날 예산 유배형을 받아 내려온 외사촌 이승훈을 원(院)에서 만나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이 사건은 정조가 천주교도 혐의를 받는 정약용에 가해지는 한양 정치권의 공세를 피해주기 위한 조치였고 이승훈의 유배지를 예산으로 정한 것도 남인계를 보호하려한 정조의 지시였다. 예산을 유배지로 정한 이유가 이승훈의 일가인 여주이씨들이 많이 살기 때문이었다.
  정약용이 종6품 말단 책임자급임에도 도찰방으로 5개월여를 근무하면서 예산 보령 부여 공주를 들쑤시고 다닌 이유도 정조의 측근인 탓이다. 이 당시 예산 지역에는 노론 벽파의 사상적 지원군인 호론의 ‘윤봉구’ ‘윤봉오’ ‘한상벽’등이 살고 있고 주변에 성호 우파의 학자들이 이십여명 살고 있었다.
  정약용은 성호 우파의 인물군들과 접촉하는 것으로 찰방 근무의 태반을 보낸다. 좌장은 이삼환(1729-1813)이었다. 이삼환은 아버지 이병휴(1770-1776)의 예산 이주와 함께 덕산으로 와 살면서 여식을 낳고 양자를 들여 대를 이은 학자로 그의 주변에는 수십명의 학자들이 모여든다. 성호우파 학단이 그들이다. 이삼환의 덕산 거주는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숙부 이용휴(1708-1782)가 이미 덕산에서 태어났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특히 이병휴는 ‘회의하는 학문 태도는 주자의 학문 태도이므로 학자는 모든 것을 회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성호학파의 밑거름이 된다.
  이삼환은 성리학에 치우치지 않고 천문 지리 수학에 관심을 두고 실재로 관측기구를 제작하는 등 실학을 학문의 덕목으로 삼았다. 이 분위기에서 이용휴의 아들인 ‘이가환’이 당대 조선 최고의 수학자로 성장한 배경이기도 하다. 이들 성호학단은 당 시대 천재로 통하는 정약용을 대 놓고 망신(?)을 줄 정도로 자긍심이 강했다.
  이 당시 덕산에는 병계 윤봉구와 석문 윤봉오 형제와 한상벽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노론 벽파의 사상의 기저인 만큼 지역 파워가 성호우파를 압도하는 형세였다. 정치적으로 노론과 남인 사상적으로 호론과 성호학파의 관계는 물과 기름이었다. 우리가 인식하는 조선의 정치사는 당과 학설이 다르면 난적(亂敵)으로 취급하여 생사를 다투는 입장이다.
  
  호론
  이이-송시열-권상하-한원진-송능상-김한록
  윤봉구-위백규 김규오.
  성호학파.
  이단하-이이-(우파)이용휴 –이삼환-허진
  (좌파) 권철신-이승훈.
  참고-굵은 글씨 예산 거주.
    윤봉구는 성리학자로 인간의 기질(氣質)을 중요시 하며 인간이 본래부터 선하다는 낙론에 대립하는 입장에서 호론의 전통 후계 한원진을 의리를 넘어 깊은 우정으로 대하며 학문의 성과에서도 한원진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송능상을 수제자로 키운 한원진 보다 오히려 ‘위백규’를 수제자로 키워 호남에 호론의 영향력을 퍼트린 것은 성과다.
  이 시대 윤봉구는 남당리에 은거한 한원진과 더불어 기호학파의 원로로 대우받는 입장이었고 성호 우파의 종장인 이삼환이 서로 십리 거리에 살았다는 것은 사건(?)이다. 이들은 거의20년을 이렇게 살았는데 이들의 관계를 연구는커녕 언급하는 글을 단 한 줄 찾을 수 없다. 이 무렵 윤봉구의 동생인 윤봉오가 한원진에게 편지를 쓴다.
 
  청하신 관례 도구는 정산(이병휴)이 아들 관례로 먼저 빌려간지라 오늘 대령을 못합니다.
  윤봉오는 가까운 곳에 사는 여주이씨 가문의 관례(조선 남자의 성인식)에 탁자 의자 돋자리등의 도구를 빌려준 것으로 다른 당파와는 상종을 하지 않을 것 같은 당시대의 상식(?)을 간단하게 부정한다. 윤봉구와 윤봉오는 각자 판서를 지낸 유력자로 병계 석문등 가야산의 지명을 자신들의 호로 사용할 정도로 지역 파워가 있었다.
  이들 형제는 예산의 자랑이었으나 이들이 말년이 되면서 아들들인 ‘윤심위’ ‘윤심약’이 아버지들의 위세를 믿고 지역에서 탐학을 일삼아 중앙 조정이 근심을 할 정도에 이른다. 그러나 윤봉오의 아들 윤심약은 영의정 김관주의 사위가 되면서 한 술 더 뜬다.
  윤씨 문중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해도 이씨 문중도 죽어 지낸 것은 아니다. 이삼환의 준호구단자에 보이는 이삼환의 재산 규모도 윤씨들에 결코 몾지 않다. 이삼환은 55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아들 내외와 동생 식솔들과 사위까지 한 집에 거느리고 살 정도로 만만치 않은 살림의 소유자였다.
  우리는 윤봉오의 편지를 통해 한 지역에서 정치 사상적으로 대척점에 선 두 문중이 각자의 방식으로 생도지망을 유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서로간에 물품을 빌려주고 빌려 갔을 정도라면 관혼상재 정도는 서로 챙겼다고 본다.
  17.18세기 충청도 지역은 정치적으로 노론이자 학문적으로 호론이 지배 했지만 유독 예산 만큼은 예외적으로 성호우파가 호론과 균형을 이루며 존재 했다. 성호학파는 성리학보다 역사방면에 장점이 있다. 이익의 해동악부와 안정복의 동사강목은 역사의 성과다. 특히 성호우파에 큰 영향을 준 안정복의 역사관의 실학의 압권이다.
  안정복은 1900년 이전 사람으로 단군을 신이 아닌 인간으로 파악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안정복은 환인 환웅등을 적극적으로 부정했지만 단군을 단씨로 보고 부루 해모수 주몽등을 후손으로 보고 조선이 나라 이름이고 단은 성씨라 단언한다. 이런 학문 태도가 성호학파의 태도다.
  조선 후기 가장 중요한 학단들의 하나인 호론과 성호학파가 어우려져 산 2백년간의 시간에 대한 연구는 지금 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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