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시리즈] 장곡사 비사
[충청 역사 시리즈] 장곡사 비사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25 1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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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의 총림이었던 장곡사.

창건 연대미상인 장곡사는 조선시대 조게종의 충청권 자복사(資福寺)로 사력(寺力)을 입증했다.
조선은 건국 초기 불교계를 7종(宗)으로 나누고 팔도의 88개 사찰을 자복사로 정하고 토지 6결(18만평에서 240만평 사이)과 노비 30구 거주 승려를 30명으로 정한 특혜를 준다.
이 88개 사찰중 충청권은 천태종의 정산 계봉사, 자은종의 비인 성주사 화엄종의 청주 원흥사등으로 이들 사찰은 장곡사외 지금 모두 폐사 되었다.
장곡사의 내력을 전하는 자료중 정조 1년(건륭 42)에 쓰여진 금당 중수기가 있다.

“장곡사는 연대를 알 수 없이 오래 되었고 지금 총림을 칭하고 있다. 보조국사 동량으로 그동안 3차례 중건을 거쳤고 고려시대는 수많은 전각으로 빼곡했다 ”
-장곡사 중수기-

1959년 이은창에 의해 수습된 장곡사 중수기는 상대웅전에 두 점의 석불과 세 점의 금동불을 기록하고 동편 벽에 수준급의 불화가 있었다 한다. 이 기록에서 주목되는 것이 총림(叢林)이다.

총림은 강원 선원 율원이 갖추어진 사찰이나 수행승들이 한곳에 숲 마냥 모여든다 하여 생긴 단어로  불교의 중심을 말하는 것이다.
장곡사가 총림을 칭한 것은 이 시대 충청권의 불교 상황을 보면 이유가 추정된다.
이 당시 충청권의 가장 큰 사찰이던 마곡사가 대화재로 전각 전부가 소실되었고 가야산의 중심 사찰이던 가야사는 승려들이 모두 내 쫒기고 토지를 몰수 당하는등 불교계가 내리막이었지만 장곡사는 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수기에는 동편 벽에 오도자(吳道子668-758)의 불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다.
오도자는 당나라의 화성(畵聖)으로 불화에 능해 그의 그림은 억만금의 가치로 평가된다.
그런 오도자의 불화가 장곡사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후기 불교 탄압은 극에 달했다.

사찰에는 가혹한 부역과 세금이 가해졌고 재산인 토지를 몰수하면서 큰 사찰부터 폐허가 되고 폐사가 되는 경우가 속출했다.  페사지 위에는 서원이 생기고 낙향한 유력자들이 집을 짓고 눌러 살게 된다.

정조 말년에 충청감사 이태영은 부여 고란사가 폐사 되어 부처가 백망강변에 나뒹군다 보고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장곡사는 조선 내내 평균 사력을 유지하고 오늘에 이른다.
여자들에게 산고의 고통을 씻어주소서.
1346년(고려 충목왕) 7월 청양 칠악(七岳) 장곡사에 고려 후기 3대승의 한분인 백운(白雲) 선사와 대시주인 낭랑군부인 최씨와 천팔십명의 시주자들이 새로 조성한 약사여래불의 복장(腹藏)에 연명으로 서명한 서원지가 만들어져 봉안 된다.

내가 들은 것은 이와 같다. 불조가 신령스럽게 감응하여 만들어 놓은 자비의 광명이 항상 머물기에 광대하여 태어남도 사람짐도 없는 정토를 두루 비추어 삼악과 사생 육도의 파란의 중생들을 인연으로 부디 성불로 이끄시기를... (약사여래 복장물)

이렇게 시작되는 발원문은 유리와 같은 고요한 세계에 사는 대의왕(大醫王)인 약사불에게 드리는 염원은 소박하고 절실하다.

산고의 고통을 씻게 해 주시고 태어나는 아이를 훌룡히 키우소서. 부디 다음 생에는 남자로 태어나게 해 주셔... (약사여래 복장물).

이 복장 유물은 고려시대 약사신앙의 실체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천여명의 서명자들은 당대의 정치 유력자부터 수백명의 여성들 그리고 두 살배기 어을(於乙)의 장수를 비는 인근 고을의 서민 여성까지 망라된다.

시주자들은 각자 자신의 서명과 발원 내용을 간단하게 기록한다.
귀족 부인은 물론 몽고인과 심지어 노비들로 추정되는 이름도 있다. 모두가 평등해야 모두 반야를 이룬다(奴婢諸眷屬皆入平等觀同爲般若)는 고려시대의 다른 부처 복장물의 기록을 고려하면 이해 된다.
불교안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종교 정신과 여성들의 생명을 위협하던 산고의 압박을 위로받고자 하던 여성들의 염원이 모인 것이 장곡사 약사불 복장 유물의 덕목이다.

이 많은 시주자들 속에 주목되는 한 사람이 있다. 빠이앤티므르(大元白帖木若)의 이름이 복장유물에 등장한다. 빠이앤티므르는 강릉부원대군 왕기(王琪1330-1374) 공민왕의 몽고식 이름이다.

장곡사 복장유물은 고려시대 약사신앙의 근저와 당대의 생활사를 담은 천팔십명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이들을 한명한명씩 연구하고 규명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다. 작은 사찰 장곡사에 국보급 문화제가 7점이나 있고 또 다른 이런 기록물이 무려 70년전에 공개된 상황에서도 몇편의 해재석 논문외 아무런 후속 연구가 없는 것은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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