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청룡도] 8회 1장 홍단[벽산검]
[연재소설 청룡도] 8회 1장 홍단[벽산검]
  • 이 은호 작
  • 승인 2019.07.2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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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9년(1809) 기사년(己巳年. 청 가경14년)의 봄이 지나고 있었다. 국사(國事)는 다난했다.

2월 함흥부(府)에 일어났던 큰 불은 3백호의 민가와 관아(官衙)의 태반이 불타 없어졌고 3월 울산부에서 일어난 화재도 함흥부에 못지않았다. 이 두 건의 화재로 발생한 이재민이 천여 호에 수천 명이 됐다.

조정은 8도에 화재 방비령을 내리고 함경 경상 양도의 감사로 하여금 복구 대책을 세우게 하는 한편 진휼사를 내려 보내 민심을 진정시키고 두 곳의 관장에 대한 과실을 논의하고 있었다.

“짐 때문인 듯하오. 지난해 극심한 가뭄이 들더니 새해를 맞아 남과 북에서 대화재를 맞고 보니 할 말이 없소이다”
왕이 편전에 들어 있는 세 명의 대신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대신들은 일곱 살 나이로 왕위에 오른 자신을 지난 9년 동안 측근에서 보필해온 측신(側臣)들이었다. 먼저 오위도총관 이효헌(李曉憲)이 말했다.

“가뭄과 화재가 어찌 전하의 잘못이겠나이까? 그런 일은 국사를 하다보면 늘상 있는 일이옵니다. 선왕 때도 세종대왕 때에도 그런 일은 있었사옵니다. 크게 심려할 일이 아닌 줄 아옵니다”
이효헌은 정조 9년에 무과에 급제한 무관이었다. 이효헌은 무관으로 여러가지 장점이 있어 정조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군문의 요직을 거치다 새 왕이 등극한 후 승지로 발탁되어 내직으로 들어와 있다가 도성의 방어를 책임진 오위동총관을 맡고 있었다.

“도총관의 말이 맞사옵니다. 전하, 그리 마음 쓰지 마사이다”
박종경(朴鐘景)이 이효헌의 말에 동조를 했다. 박종경은 몇해 전 승하한 정순왕후의 총애로 병조판서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고 잠시 지방으로 내려가 있다가 다시 포도대장을 거쳐  형조판서로 복귀한 인물이었다.

“부원군께서도 그리 생각하시오?”
왕이 부원군 김조순(金祖淳)에게 물었다. 김조순은 정조 9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사운사 일행으로 중국에 다녀온바 있었고 특히 예조의 일에 두각을 나타내어 정조의 총애를 받고 규장각 책임자와 주교사(舟橋司) 책임자로 능력을 인정받아 마침내 정조에 의해 사돈으로 발탁 되는 영예의 대신이었다. 왕의 장인인 것이다.

“전하, 하늘의 일은 전하의 잘못은 아니나 군왕은 하늘의 일에도 책임이 있는 법이니 더욱 삼가고 근신해야 할 줄로 압니다. 하여 시경에도 삼가고 삼가라 하지 않았는지요?”
김조순은 시경 국풍을 들어 말했다. 조선의 논객들은 논리전개를 위해 시경을 끌어와 자신들의 주장에 활용하곤 했다. 부시(賦詩)와 인시(引詩)는 중국 고대로부터 지식인들의 중요 과제였지만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거의 맹목적(?)이 되어 있었다.

“그 말은 군왕은 자신의 과오 말고도 하늘의 일까지 책임이 있다는 말이구료?”
왕이 김조순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새 열일곱 헌헌장부가 된 왕이었다. 재위 기간도 9년차에 들어서 있어 국사에도 어느 정도 눈을 뜨고 있기도 했다.

“그렇나이다. 금년 들어 함흥 울산에 거듭 큰 불이 난 것은 하늘의 일이기는 하나 피해를 당한 백성들이 헤아릴 수 없으니 먼저 관장들의 책임을 묻고 뒷수습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김조순이 함흥 울산부의 관장들을 채직할 것을 주청했다. 박종경이 곧바로 끼어들었다.

“부원군 대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전하? 두 고을의 관장을 채직하는 것은 지나치다 보옵니다. 더구나 울산부로 내려간 조득경은 당료기도 하옵니다”
박종경은 앞뒤 가리지 않고 왕과 국구(國舅) 김조순 앞에서 할 말을 했다. 왕은 노론 시파(時派)의 보위를 받는 입장이었다. 심환지 김응로 등의 노론 벽파가 무너진 후 조정은 시파의 천하였고 김조순을 수장으로 한 시파는 박종경 같은 행동파로 인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하긴, 조득경은 울산으로 내려간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왕이 얼마 전 지방으로 내려가는 관장들의 인사를 받았기에 조득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겨우 서너 달 되었나이다. 자칫 파직이라도 당하면 다시 요직을 감당하기 힘들고 장차 조득경은 당에 크게 쓸 수 있는 재목이옵니다. 통촉하소서”
박종경은 머리를 조아렸다. 왕이 김조순의 얼굴을 살폈다. 김조순이 더는 채직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분 나빠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사관(史官)은 파직을 주청한 김조순과 그것을 꺾은 박종경을 기록할 터이다. 결국 일은 호조와 병조에서 규휼미를 양부로 내려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왕이 다시 관상감에서 올라온 구화식(救火式)을 거론했다.

관상감은 하늘의 변고가 있음을 보고해 왔고 보고를 받은 국왕은 처리 결과를 관청에 회답해 주어야 하는 것이 국법이었다.

“구화식을 한다면 민심이 동요할까 저어됩니다. 부원군대감 안그렇습니까?”
박종경이 김조순을 바라보며 물었다. 김조순이 고개를 끄덕이며 왕에게 말했다.

“관상감이 앞서간 듯합니다. 구일식(救日式)도 아닌데 하늘의 변고를 말하는 것도 그러하고요”
김조순이 하늘의 변고를 운운하며 호들갑을 떨어온 관상감을 탓했다. 관상감은 서운관의 후신으로 일기와, 천문, 그리고 왕실의 사주팔자를 말하는 명운 전체를 관장하는 관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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