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역사 칼럼] 박지원과 박제가
[충청 역사 칼럼] 박지원과 박제가
  • 이 청 논설위원
  • 승인 2019.07.23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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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투데이/ 이 청 논설위원] 박지원과 박제가는 사승관계(師承關係)다. 18살의 박제가가 32살 박지원의 명성을 듣고 백탑 근처의 박지원의 집을 찾아 인사를 청하자 박지원은 두 손을 들어 환영을 하며 반겼다. 손수 쌀을 씻어 밥을 지어 먹이며 박제가가 그동안 읽은 책을 묻고는 내용을 논하며 하룻밤을 지낸 일화는 선가(禪家)의 그것을 방불케 한다.

나와 하늘은 차이가 없다(天我無間)는 박지원의 철학이 빚은 그의 인간 교우 관계는 노론벽파의 핵심인 유언호 등과의 교류는 물론 신분사회에서 하류에 속하는 서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상수 등과 북학이란 토대를 만든다.

박지원은 수많은 제자 중 박제가 유득공을 특히 아끼고 격려하며 또 한편으로 걱정도 한다.

박지원의 편지에 급한 성격의 박제가와 바질 없는 유득공을 타박하는 기록이 복수로 등장한다. 박지원이 면천군수로 내려온 수년 전 충청도를 박제가와 유득공 정약용 등이 거쳐간다.

부여현감 금정찰방이 그들이 거쳐간 자리다. 박제가는 공주 부여 경계의 ‘이인도찰방’을 하기도 한다. 박제가는 이인역에서 바둑이 등장하는 아래의 시를 짓기도 했다.
(鳩聲襄酒人還  終日我詩簿領問 卯色新笺來岬寺 麓香官墨出公山  神遊物表魚川里 道在書中豹一斑 歸計差池成筮隱 碧欄紅閣奕碁聞)

-박제가-

박제가는 이때 아내를 잃는다.

박제가는 정약용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12살 어린 나이차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학이란 접전으로 소통을 했다. 두 사람은 매우 가까웠다.

종두법을 서로 연구하고 개고기 요리를 전수하는 등 서로간 교류가 정겹다. 박지원을 면천으로 찾아온 사람 중 윤가기(尹可基)가 있다. 박제가와 사돈간인데 끝내 ‘윤가기 사건’으로 의금부에 끌려가 윤가기는 사형을 당하고 박제가는 경성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 윤가기의 시 열 편이 한달전 번역 소개된 박지원의 ‘면양잡록’(당진문화원 발간)에 아무런 설명(윤가기에 대한 설명이 없어 박지원의 작품으로 오인하게 한다) 없이 수록되어 있다.

윤가기도 박제가 못지않게 과격한 성격이었다. 윤가기 박제가 등이 고초를 겪는 형장에 정약용 이가환 등도 끌려와 심문을 당한다. 이들을 무고한 인물들이 남인계열인 이기경 홍낙안이다. 이기경은 정약용의 친구였다. 우리는 정조 사후 정권을 잡은 노론 벽파, 그 중에서도 정순왕후 김씨가 정약용 이가환 박제가 등을 탄압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사형직전 박제가와 정약용의 목숨을 구명해준 사람이 김씨임을 알면 뜨악해진다.

김씨는 1년만에 박제가의 유배를 풀어주었는데 현장에서 1년 넘게 뭉개고 있는 것을 알고 의금부 당상을 파직시키기도 한다. 박제가는 이런 김씨를 자애롭고 현명한 여자라 기록하기도 했다. 박지원의 앞집에는 어린 이서구가 살았다.

이서구는 박지원의 제자 중의 제자다. 훗날 정승에 오른 이서구는 스승 박지원을 그리는 글을 쓴다.
‘예전에 선생께서 저와 함께 한마을에 사셨지요. 눈 오는 어느날 밤 선생을 찾았는데요. 선생께서 손수 술을 데우셨고 저는 떡을 화로불에 구웠는데요. 불기운이 뜨거워 몇 번이고 떡을 잿속에 떨구자 이를 바라보시며 몹시도 즐거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님 머리가 하얗고 저 역시 수염이 거뭇거뭇 하답니다’ 서구는 스승 박지원이 군수를 할 때 이미 관찰사를 거친 사람이다. 그는 이가환 정약용 등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한다. 박지원과 정약용은 25살의 나이 차이가 나지만 당대의 대 지성으로 이름난 두 사람 사이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관계가 소원하다. 서로가 언급한 기록이 한두 대목일 정도다.

아마도 박지원이 종질 박종경이 채제공을 죽여야 한다던지 이서구가 정약용을 죽여야 한다는 등의 얽히고 설킨 인간 관계망이 만든 것은 아닌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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